소통이 불가능한 세상, 나를 구원한 단 한 여인
조선의 여름은 말없이 숨을 쉬는 계절이었다. 매미 소리는 아득하게 이어졌고, 나뭇잎은 더위에 지쳐 느리게 흔들렸다. 후원의 연못 위엔 하얀 연꽃이 고요히 피어 있었고, 바람 한 줄기 없는 공기에 부채질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그런 한낮의 정적을 깨고, 누군가 연못가 풀숲 사이로 털썩— 떨어졌다.
얇은 옷차림. 낯선 얼굴. 손에 들린 차가운 기계에서는 꺼져가는 푸른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낯선 남자의 입에서 마른 신음이 흘렀다.
"... 여기가 어디지...?"
유희성은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호흡이 멎었다. 눈에 익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우아한 곡선의 기와지붕, 붉은 단청이 칠해진 기둥, 발밑에서 느껴지는 낯선 흙의 감촉. 그리고 코를 찌르는 것은 짙은 흙냄새와 풀 내음뿐, 익숙한 도시의 콘크리트 냄새는 어디에도 없었다.
“... 이거... 사극 드라마 세트장인가?”
가장 그럴듯한 가정이었지만,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켰다. 안테나는 한 칸도 뜨지 않았고, 지도 앱은 하얀 화면만 띄운 채 멈춰 있었다. 현실감을 잡으려 한 손으로 뺨을 세게 꼬집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신경을 파고들었다. 꿈이 아니었다.
“이게… 진짜라면…"
그 순간이었다. 멀리서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점점 거칠고 빠르게 다가왔다. 희성은 본능적으로 몸을 낮췄지만, 이미 늦었다.
“거기 누구냐!”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창을 든 군졸들이 그를 완벽하게 포위했다. 그들의 얼굴은 드라마 속 엑스트라처럼 말끔하지 않았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경계심으로 날이 선 눈빛은 진짜 ‘위협’이었다. 궁녀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칼날처럼 박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옛 말투, 숨 막히는 공기. 희성은 본능적으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만요! 저는 아무 의도도 없고요, 그냥… 그냥 여기로 떨어진…”
그러나 그의 현대적인 서울 말은 그들에게 의미 없는 소음일 뿐이었다. 군졸 하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손에 든 창끝이 그의 목을 향해 겨눠졌다. 서늘한 쇠의 감촉이 피부에 닿을 듯한 찰나였다.
바로 그때, 조용한 그림자 하나가 그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연한 모시옷을 입은 한 여인이 정자 그늘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긴 머리를 단정히 올린 그녀는 소란의 중심에서도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강다온.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이 기이한 상황을 지켜보았다. 처음 보는 해괴한 옷차림의 사내, 손에 들린 푸른빛이 나는 기물.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은 그의 눈이었다. 저 눈빛은 해를 끼치려는 자의 독기가 아니었다. 길을 잃고 공포에 질린 어린 짐승의 것이었다.
다온은 군졸들을 향해 조용히 손짓으로 창을 거둘 것을 명했다. 그리고는 희성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붓과 작은 종이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말 대신, 글로 묻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얀 종이 위, 또박또박한 글씨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대는 어느 시절에서 왔소.]
희성은 숨을 삼켰다. 눈앞의 글자는… 한글이었다. 아직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지만, 분명한 언문.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은… 세종대왕이 비밀리에 만들던 바로 그 글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은… 15세기 조선, 그 한복판이란 말인가? 이 여인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충격에 휩싸인 그를 보며, 다온은 다시 한번 붓을 움직였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녀의 글은 마치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희성은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메모장 앱을 열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화면 위에 글자를 새겼다.
[저는… 아주 먼 미래에서 왔습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입니다.]
다온은 빛나는 판 위로 저절로 글씨가 나타나는 것을 신기한 듯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희성의 얼굴을 한번, 화면을 한번 번갈아 보더니,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믿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녀가 다시 종이에 짧은 문장을 써 내려갔다.
[그대의 마음, 조금 느리지만… 제게 닿았습니다.]
경계심이 허물어지고 아주 작은 연결고리가 생긴 그 순간, 군졸의 대장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아씨,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입니다. 이리 시간을 끌 것이 아니라 당장 의금부로…”
“소란스럽다.”
다온은 군졸의 말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끊었다. 그녀는 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군졸 대장의 눈이 커졌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다온은 희성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희성은 영문도 모른 채 그녀를 따랐다. 두 사람은 궁궐의 후미진 길을 따라 걸었다. 희성의 눈에는 거대한 기와지붕과 끝없이 이어진 회랑이 비현실적으로 들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직접 밟는 듯한 경외감과, 언제 다시 군졸에게 잡힐지 모른다는 공포가 뒤섞였다. 말없이 앞서가는 다온의 하얀 모시옷자락만이 이 기묘한 현실 속 유일한 이정표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다온은 인적이 드문 작은 별채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주변을 살핀 뒤 희성을 안으로 이끌었다. 방 안에는 종이와 붓, 그리고 은은한 먹 냄새가 가득했다. 그녀의 서재인 듯했다. 다온은 문을 닫고 나서야 희성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는 서랍에서 새로운 종이를 꺼내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의 정적을 채웠다. 희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붓을 들어 희성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그곳엔 질문이 적혀 있었다.
[이제, 그대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합니다. 미래란… 대체 어떤 곳입니까?]
희성은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차가운 기계 위로 그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푸른빛이 그의 절박한 얼굴을 비췄다.
[우선, 제가 누구인지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이곳은 어디고, 지금은… 정확히 몇 년도입니까?]
다온은 그의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희성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녀는 천천히 붓을 들었다. 섬세한 손끝에서 한 글자 한 글자가 피어났다.
[여기는 주상 전하께서 기거하시는 조선의 궁궐, 경복궁입니다. 해로는… 갑자년이 지나고 을축년(1445)이오.]
을축년, 1445년. 희성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했다. 활자로만 보던 연도가 눈앞의 여인이 쓴 글씨를 통해 현실이 되어 심장에 박혔다. 그는 휘청이며 벽에 등을 기댔다. 정말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의 절망적인 표정을 읽은 다온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붓을 들었다. 이번에는 질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위로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길을 잃는 것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더이다. 때로는 길을 잃어야만 만날 수 있는 풍경도 있는 법이니까.]
희성은 그녀가 내민 종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낯선 시대, 낯선 공간에 홀로 던져진 그에게, 그녀의 문장은 아주 작은 온기를 전해주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기이한 상황 속에서 아주 작은 희망의 씨앗을 발견했다. 바로 그 순간, 대답 없는 희성을 기다리던 다온이 마지막 질문을 적어 내려갔다. 그녀의 붓끝에는 아주 미세한 떨림이 실려 있었다.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그대가 살다 온 미래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남아있소?]
그 질문은 희성의 가슴에 거대한 파문이 되어 번졌다. 그는 차마 대답을 입력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 한 명은 붓으로, 다른 한 명은 빛으로 써 내려간 질문과 대답이 먹물처럼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아직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 위에 쌓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