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흙과 바람을 맞이하다.

소통이 불가능한 세상, 나를 구원한 단 한 여인

by 유블리안

[1445년, 조선–경복궁 서편, 후원 한 곳]


​조선의 여름은 말없이 숨을 쉬는 계절이었다. 매미 소리는 아득하게 이어졌고, 나뭇잎은 더위에 지쳐 느리게 흔들렸다. 후원의 연못 위엔 하얀 연꽃이 고요히 피어 있었고, 바람 한 줄기 없는 공기에 부채질 소리만 간간이 들려왔다.
​그런 한낮의 정적을 깨고, 누군가 연못가 풀숲 사이로 털썩— 떨어졌다.


​얇은 옷차림. 낯선 얼굴. 손에 들린 차가운 기계에서는 꺼져가는 푸른 불빛이 희미하게 깜빡였다. 낯선 남자의 입에서 마른 신음이 흘렀다.


​"... 여기가 어디지...?"


​유희성은 깨질 듯한 머리를 부여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둘러보는 순간, 호흡이 멎었다. 눈에 익은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었다. ​우아한 곡선의 기와지붕, 붉은 단청이 칠해진 기둥, 발밑에서 느껴지는 낯선 흙의 감촉. 그리고 코를 찌르는 것은 짙은 흙냄새와 풀 내음뿐, 익숙한 도시의 콘크리트 냄새는 어디에도 없었다.


​“... 이거... 사극 드라마 세트장인가?”


​가장 그럴듯한 가정이었지만,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손에 들린 스마트폰을 켰다. 안테나는 한 칸도 뜨지 않았고, 지도 앱은 하얀 화면만 띄운 채 멈춰 있었다. 현실감을 잡으려 한 손으로 뺨을 세게 꼬집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신경을 파고들었다. 꿈이 아니었다.


​“이게… 진짜라면…"


​그 순간이었다. 멀리서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는 점점 거칠고 빠르게 다가왔다. 희성은 본능적으로 몸을 낮췄지만, 이미 늦었다.


​“거기 누구냐!”


​날카로운 외침과 함께 창을 든 군졸들이 그를 완벽하게 포위했다. 그들의 얼굴은 드라마 속 엑스트라처럼 말끔하지 않았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와 경계심으로 날이 선 눈빛은 진짜 ‘위협’이었다. ​궁녀들이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모든 시선이 그에게 칼날처럼 박혔다. 알아들을 수 없는 옛 말투, 숨 막히는 공기. 희성은 본능적으로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만요! 저는 아무 의도도 없고요, 그냥… 그냥 여기로 떨어진…”


​그러나 그의 현대적인 서울 말은 그들에게 의미 없는 소음일 뿐이었다. 군졸 하나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으며, 손에 든 창끝이 그의 목을 향해 겨눠졌다. 서늘한 쇠의 감촉이 피부에 닿을 듯한 찰나였다.


​바로 그때, 조용한 그림자 하나가 그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으로 향했다. 연한 모시옷을 입은 한 여인이 정자 그늘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긴 머리를 단정히 올린 그녀는 소란의 중심에서도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강다온.


​그녀는 잠시 멈춰 서서 이 기이한 상황을 지켜보았다. 처음 보는 해괴한 옷차림의 사내, 손에 들린 푸른빛이 나는 기물. 하지만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은 그의 눈이었다. 저 눈빛은 해를 끼치려는 자의 독기가 아니었다. 길을 잃고 공포에 질린 어린 짐승의 것이었다.


​다온은 군졸들을 향해 조용히 손짓으로 창을 거둘 것을 명했다. 그리고는 희성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붓과 작은 종이를 그의 앞에 내밀었다. 말 대신, 글로 묻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얀 종이 위, 또박또박한 글씨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대는 어느 시절에서 왔소.]


희성은 숨을 삼켰다. 눈앞의 글자는… 한글이었다. 아직 완전한 형태는 아니었지만, 분명한 언문. 믿을 수 없었다. 이것은… 세종대왕이 비밀리에 만들던 바로 그 글자가 아닌가? 그렇다면 지금은… 15세기 조선, 그 한복판이란 말인가? 이 여인의 정체는 대체 무엇인가..​충격에 휩싸인 그를 보며, 다온은 다시 한번 붓을 움직였다.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인가?]


​그녀의 글은 마치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희성은 떨리는 손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메모장 앱을 열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화면 위에 글자를 새겼다.


​[저는… 아주 먼 미래에서 왔습니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입니다.]


​다온은 빛나는 판 위로 저절로 글씨가 나타나는 것을 신기한 듯 오래 들여다보았다. 그리고는 희성의 얼굴을 한번, 화면을 한번 번갈아 보더니,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믿어주기로 한 것이다. ​그녀가 다시 종이에 짧은 문장을 써 내려갔다.


​[그대의 마음, 조금 느리지만… 제게 닿았습니다.]


​경계심이 허물어지고 아주 작은 연결고리가 생긴 그 순간, 군졸의 대장이 참지 못하고 앞으로 나섰다.


​“아씨, 정체를 알 수 없는 자입니다. 이리 시간을 끌 것이 아니라 당장 의금부로…”
​“소란스럽다.”


​다온은 군졸의 말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끊었다. 그녀는 품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내 그에게 보여주었다. 군졸 대장의 눈이 커졌다.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다온은 희성에게 눈짓을 보냈다. 어서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었다.


​희성은 영문도 모른 채 그녀를 따랐다. 두 사람은 궁궐의 후미진 길을 따라 걸었다. 희성의 눈에는 거대한 기와지붕과 끝없이 이어진 회랑이 비현실적으로 들어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직접 밟는 듯한 경외감과, 언제 다시 군졸에게 잡힐지 모른다는 공포가 뒤섞였다. 말없이 앞서가는 다온의 하얀 모시옷자락만이 이 기묘한 현실 속 유일한 이정표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다온은 인적이 드문 작은 별채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주변을 살핀 뒤 희성을 안으로 이끌었다. 방 안에는 종이와 붓, 그리고 은은한 먹 냄새가 가득했다. 그녀의 서재인 듯했다. ​다온은 문을 닫고 나서야 희성을 향해 돌아섰다. 그리고는 서랍에서 새로운 종이를 꺼내고 먹을 갈기 시작했다.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방 안의 정적을 채웠다. 희성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녀가 붓을 들어 희성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그곳엔 질문이 적혀 있었다.


​[이제, 그대의 이야기를 들어볼까 합니다. 미래란… 대체 어떤 곳입니까?]


​희성은 다시 스마트폰을 들었다. 차가운 기계 위로 그의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푸른빛이 그의 절박한 얼굴을 비췄다.


​[우선, 제가 누구인지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이곳은 어디고, 지금은… 정확히 몇 년도입니까?]


​다온은 그의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희성은 그녀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녀는 천천히 붓을 들었다. 섬세한 손끝에서 한 글자 한 글자가 피어났다.


​[여기는 주상 전하께서 기거하시는 조선의 궁궐, 경복궁입니다. 해로는… 갑자년이 지나고 을축년(1445)이오.]


​을축년, 1445년. 희성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듯했다. 활자로만 보던 연도가 눈앞의 여인이 쓴 글씨를 통해 현실이 되어 심장에 박혔다. 그는 휘청이며 벽에 등을 기댔다. 정말로…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갇혀버린 것이다. ​그의 절망적인 표정을 읽은 다온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다시 붓을 들었다. 이번에는 질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위로에 가까운 문장이었다.


​[길을 잃는 것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더이다. 때로는 길을 잃어야만 만날 수 있는 풍경도 있는 법이니까.]


​희성은 그녀가 내민 종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낯선 시대, 낯선 공간에 홀로 던져진 그에게, 그녀의 문장은 아주 작은 온기를 전해주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리고 처음으로, 이 기이한 상황 속에서 아주 작은 희망의 씨앗을 발견했다. ​바로 그 순간, 대답 없는 희성을 기다리던 다온이 마지막 질문을 적어 내려갔다. 그녀의 붓끝에는 아주 미세한 떨림이 실려 있었다.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그대가 살다 온 미래에도… ‘조선’이라는 이름이 남아있소?]


​그 질문은 희성의 가슴에 거대한 파문이 되어 번졌다. 그는 차마 대답을 입력하지 못했다. ​두 사람 사이, 한 명은 붓으로, 다른 한 명은 빛으로 써 내려간 질문과 대답이 먹물처럼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아직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이 그렇게, 역사의 한 페이지 위에 쌓여가고 있었다.


희성과 다온의 필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