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30분, 방안에 홀로 앉은 인간은 내장으로 소리를 내지 않는다. 오로지 무감하고 수동적인 도구에 기대어 기호로 그려낸 그림으로 전하는 '정신'의 소리마저도 인간의 육체에서 내려오는 전기 신호의 결과임에, 인간이 공감한다는 것은 비슷하게 생겨먹은 뇌에서 같은 전기 신호를 흘려보낸 것에 불과한 것을 깨닫는다. 새벽 바람을 차가워하면서도 누구도 '차갑다'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은 모든 인간이 똑같은 감각 기관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정적이라는 발성 기관의 정지 상태에 많은 관념을 투사했다.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상태를 두고 어떤 이는 이해를, 어떤 이는 방관을, 어떤 이는 무력을, 어떤 이는 사랑을 이해했으며 나는 피로를 이해한다. 코끼리를 만지면서 그것이 무언지 몰라도 되는 건 볼 수 없는 장님에게나 허락된 일인 것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인간이 같은 걸 보면서 이다지도 다른 것을 이해하고 저마다 탄복한다. 하지만 그 또한 자연스럽다. 그것이 바로 '개체'라는 것의 정의이므로.
같은 감각 기관으로 같은 감각을 공유하면서, 결국 다른 소리를 할 수밖에 없는 개체라는 존재들 사이에서 오늘도, 나는 '나'로 존재한다. 새벽 3시 30분, 정적을 느끼는 똑같이 생겨먹은 감각 기관에서 오는 '감각'과 그걸 다르게 뱉어내는 '감상'을 되새김질하며. 오로지 이 개체만이 이 순간의 정적을 되새김질한다. 그 누구도 내가 될 수 없으니 응당 내가 씹어삼켜야할 '감정'이었다.
당신이 새벽 3시 30분을 공감하는 것은 우리가 같은 구조의 내장 기관을 가진 존재인 탓이요, 그럼에도 똑같은 새벽을 보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는 피부로 갈라진 개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 자리에서 서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 위로를 얻는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떠한 관념도 투사할 수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