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굳이 그렇게까지
"모르면 모른다고 해. 그리고 모르면 물어서 알아보고 뭘 해야 하는 거 아냐?"
모른다는 것에 짜증이 났고 결과물에 더 짜증 났다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참담함이 몰려오고 한편에서는 자존심이 몹시 상합니다.
'언제 가르쳐 줘 봤어? 내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는데 그걸 어찌 아냐고.
그리고 이틀 만에 뭘 써서 가져오라며. 내용파악할 사이가 어딨었냐고.'
속으로 분노와 변명과 원망의 마음을 품습니다.
"왜? 무슨 할 말 있어?"
"아뇨."
"가서 주변에 좀 물어봐. 저기 지난해 기획해 봤던 000이나, 아니면 옆 자리에 너보다 좀 먼저 들어온 00 씨한테. 갠 나이도 비슷해서 대화가 될 거 아냐. 그래서 이따 오후 1시까지 다시 써와."
부글부글 끓지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제자리로 돌아와 고개를 푹 숙인 채 마음을 추스릅니다.
그날 저녁 친구를 만나 상사를 씹으며 술이 떡이 되도록 마십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이를 갈며 실력을 연마하리라 다짐하죠. 점점 달라져가는 내 눈빛에 선배는 대견하다며 칭찬하는 일이 그 후로 종종 생겨납니다.
"장족의 발전이다. 그래 물어보고 하니깐 되잖아. 자존심이 어딨어. 일에 자존심은 없다."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이고 축적된 경험이 없으면 일도 더딥니다.
특히 신입 때나 새로운 직무를 맡게 되었을 경우, 탄탄한 내공이 없으면 헤매는 건 당연지사입니다.
그때 만나는 상사는 일은 물론 성격 형성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신입 때 만난 상사는 권위, 인정욕구와 실력 등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자
직선적이고 불같은 성격의 사람이었습니다. 워커홀릭에 술도 말술이었고요. 그럼에도 얼마나 새벽형 인간이었던지 8시 전에 항상 출근해 있었습니다.
아우라에 눌려 쉽게 다가가기 어려운 사람이랄까요. 왠지 선배님 이거 좀 알려주세요 하기가 꺼려지는,
그냥 혼날 것 같고, 그런 건 너무 기초적인 거라 한심해할 것 같기도 하고.
실력자 앞에서 같이 실력자여야지 되는데 너무 초짜라서 내심으로 가망 없다고 판단해 버릴까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좀 아는 척, 몰라도 다 꾀고 있는 척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다들 너무 바빠 주변 누구에게 물어보기도 뭐 했고, 사실 뭘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게 저는 백지상태였습니다.
그게 딱 걸려 눈물 쏙 빠지게 엄청 혼나기를 몇 번 반복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때부터 그 사람을 엄청나게 싫어하기 시작했고, 말도 안 하거나 별거 아닌 일로 버티며
일을 안 하거나 했습니다. 유치했지만, 당시 저는 어리고 여렸고.
자존심에 금이 갔달까요. 암튼 저는 잠시 이상 성격이 되어 버렸습니다.
에이스로 등극하리라며 마음을 고쳐 먹은 건 그런 일이 더 몇 번 있고 난 어느 순간부터였던 것 같은데
암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가 있었냐는 안 좋은 감정만은 여전했습니다.
그냥 이래서 저러하니 저렇게 해서 이렇게 해봐라라고 드라이하게 방법을 탁탁 알려주면 되는 거
아닌가. 왜 그 말속에 자기감정을 실어서, 너 때문에 내가 사장 볼 면목이 없다느니, 이래서 어디 제대로 생존하겠냐느니, 기본이 안되어 있으면 날밤을 세서라도 기본기를 늘리라느니, 놀 궁리 말고...
그렇게까지 말을 해야 하는 거란 말이란 말입니까!라는 마음 만은 가슴 저 밑바닥에 꾹꾹 눌러 담은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내가 당신의 위치에 가면 나는 절대 그러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말이죠.
물론 그 상사와는 4년 넘게 일하며 미운 정 고운 정들면서 퇴사 후에도 종종 연락하는 사이가 됐지만,
여전히 그 스타일만큼은 답습되어서는 안 된다고 확고한 제 생각을 그 앞에 밝히기도 했습니다.
어느덧 그로부터 이십 년도 훨씬 지났습니다.
지금 제가 후배들과 지지고 볶고 있습니다.
간혹 저 친구는 왜 모르면서도 배우려고 하지 않지 하는 의문이 드는 친구가 있습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까지 괜찮은데, 꼭 아는 척을 합니다.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죠. 잘 모르는데 지금 아는 척을 하고 있고 그건 네 자존심 때문이겠구나.
느닷없이 그 상사가 떠올랐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그처럼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후배에게 어떻게 말을 할지 요리조리 고민하다 보면
또 다른 급한 일이 닥쳐 어느 순간 까마득히 잊고,
또 모르는데 아는 척을 하는 후배의 얘기는 무한반복 됩니다.
그리고 큰맘 먹고 면담이란 걸 할 때 조심스레 얘기를 꺼냅니다.
모르면 알려고 하고 정확한 사실과 근거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상대를 설득하는 게 모든 일의 기본이라고.
그 친구는 고개를 숙인 채 '네'라고 답하지만 그 친구 속마음이 제게 전달이 됩니다.
네가 언제 나한테 알려줘 본 적이 있어? 그때 똑같은 말 할 때 그냥 있었잖아. 왜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래도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말을 이어갑니다.
순간, 나의 지난 과거를 얘기하면 효과적일까 싶습니다.
나 때는 말이야....
아이고, 이래서 '나 때는 말이야'를 말하는 꼰대가 되는 건가요.
이 방법밖에 없나요. 상사도 정말 쉬운 일이 아니군요. 직장생활 30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매일 매일 고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