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이걸 원고라고 썼냐?

- 인간에 대한 실망

by 유연

사람 기억이란 게 정확할 수는 없기에 어쩌면 제가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 기억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만, 자존심과 싸운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이 일이 떠올랐습니다.


바야흐로 삼십 년 가까이 지난 머나먼 예전,

아이엠에프 사태 이후 취업길이 막혔던 사정인지라 대학 졸업 후 이렇다 할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지내던 시절이었습니다.


공과금이며, 월세며 내야 할 돈과 생활비를 감당하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고 선배의 소개로 작은 프로덕션에서 글을 쓰는 알바를 했습니다.


그때 제 나이 스물대여섯.

경력 10년, 15년 차로 서른을 훌쩍 넘겼거나 아니면 아예 마흔을 넘긴 베테랑 작가들 사이에서 무경력의 저에게 아주 작은 프로그램의 원고를 작성하는 일이 맡겨졌습니다. 편당 페이를 지급받았기에 일주일에 한두 편을 하면 그나마 먹고살 수는 있었고 관대한(?) 선배 덕분에 몇 달간 그 선배 프로그램을 도맡아 원고를 작성하며 자리를 잡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웬걸, 전혀 아니었습니다.




출처: 픽사 베이


어느 날, 다른 선배와 일을 해보라며 함께 일하던 선배가 다른 선배를 소개해줬는데,

열심히 취재하고 원고를 써서 제출한 후 피드백을 기다리던 사이 이상한 소리를 그만 엿듣고 만 거죠.


"너무 약해. 아, 이 pd가 믿고 맡기라고 해서 썼는데... 안 되겠는데. 큰일인데, 김 작가가 좀 도와줄래?"

"원고는 어쩌고?"

"이 원고? 이건 버려. 쓸게 없어 하나도. 휴지통으로 가야 할 원고야."


그러니깐, 내가 쓴 원고는 폐기처분하고 다른 작가에게 새로 써달라고 부탁하는 거였습니다.

순간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구겨진 자존심에 가장 먼저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무엇이 부족한지 가장 먼저 원고를 쓴 작가에게 말을 하고 나서 안되면 다른 작가에게 부탁하는 게 순서가 아니겠냐는 생각이 들면서 이성을 잃고 말았습니다.


처음엔 그저 앉은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충격이었지만

연이어 들린 그 pd의 말에 저는 뚜벅뚜벅 그에게 걸어갔습니다.


"뭘 믿고 이 pd가 저 친구를 감싸고도는지 모르겠지만, 혹시 둘 사이에 뭐가 있는 거 아냐?"




출처: 픽사베이

"저기 박 pd님, 말씀이 좀 심하신데요."


그다음 벌어진 일을 요약하면 그는 나보다 더 화를 냈고 나는 바락바락 대들며 결국은 그 길로 그 회사를 나오고야 말았다는 거였습니다.


저를 소개했던 선배는 어안이 벙벙해하며 말렸지만 저는 어울리지 않는 옷은 과감히 벗어버려야 한다는 듯 선배에게 말했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멋진 작품 만드세요."


그는 내 뒤통수에 대고 고마운지 알아야지라고 했던 것 같고요. 저는 풀리지 않는 모멸감으로 벌벌 떨며 집까지 걷고 또 걸었던 기억이 납니다.


체계적으로 배운 적도 없이 하게 된 일이었기에 어쩌면 그 pd가 내게 가진 불만은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 실력도 없고 경력도 없는 초짜배기에게 1시간가량의 방송 원고를 통으로 맡기기에는 리스크가 컸던 거죠.

그래, 회사가 대학도 아니고 가르쳐 일을 시킬 수 없다고 저도 생각합니다.

내가 정규직이었다면 사정이 좀 달랐을지는 모르겠다는 자격지심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완벽한 아웃풋을 내야 하는 프리랜서 작가라는 타이틀이 초짜배기에는 너무 큰 타이틀이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해야 할 말이 있지. 어떻게 나를....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매우 불쾌한 감정이 듭니다.

분노는 사그라졌지만, 한편으로 그 pd에게 불쌍한 마음이 들 정도로 까마득하게 지난 일이지만,

인간에 대해 처음으로 대실망을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 pd요? 모릅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일이 있고 한 사오 년 뒤, 방송국 로비에선가 우연히 그의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아는 척해야 한다는 마음이 들기도 전에 몸이 먼저 그를 피했습니다.


좀 차근차근 제대로 밟아서 올라갔더라면 그와의 인연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제가 너무 급하게 메인 작가 타이틀을 달고 돈을 벌려고 하다 보니 어울리지 않은 옷을 입고

설친 탓이었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는 팀장이었고, 중간 관리자였습니다.

좀 더 배우고 메인 작가를 하면 어떻겠냐고 선배답게 조언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부족한지를 차근차근 설명했더라면 저는 아마도 자존심은 좀 구겨졌어도,

인간에 대한 경멸의 마음은 품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그날의 일을 조금이라도 마음에서 후회하고 반성했을까요.

그가 어떻게 그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을지, 사뭇 궁금해지지만

아마도 저와는 180도 다른 기억을 갖고 있을 겁니다.

글도 못쓰고 성격도 더러운 이상한 아르바이트생이 어느날 회사를 쑥대밭으로 만들고 갔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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