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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딱좋은나 Jan 07. 2025

신나게 갖고 놀다 제자리에만 갖다 놔.

나의 전남편은 관대하다

"오빠 씹으니까 좋아?"

"그래서 오빠 욕 실컷 하고 왔어?"


오랜만에 밖에서 지인을 만나고 들어온 내게 그가 물었다.


그와 나, 우리는 비록 이혼한 전남편 전부인이지만

여전히 한 집에서 살고 한 침대에서 잠을 자는 동거인이라

어지간한 자리엔 늘 한 세트로 같이 다닌다.


술을 먹을 때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쇼핑을 할 때에도.

우리는 언제나 일심동치미, 한 덩이이다.


그런 우리 중 내가 이렇게 가끔 그와 떨어져 지인과 따로 시간을 보내고 오면

그는 내게 항상 웃는 얼굴로 묻는다.


제 욕을 많이 하고 속 좀 풀고 왔냐고.


"당연하지! 귀 안 간지러웠어?" 하고 내가 대답하면 그는 가소롭다는 듯 웃는다.


"이제 그럴 짬바는 지났지."




사실, 내 전남편이자 현 동거남인 이 남자를 작정하고 씹으려고 들면

아주 너덜너덜해질 개껌처럼 씹어돌릴 게 많아도 너무 많다.


여전히 매달 돈 걱정을 하게 만드는 무능함과 도통 발전이라고는 모르는 그의 수 감각.

아이들에게 급발진하듯 갑자기 버럭하는 성질머리.

여전히 나에게 시크하고 무심해서 아직도 나를 애타게 만든다.


그러다보니 나는 그를 자주 씹는 편이다.

아주 꼭꼭. 잘근잘근. 우적우적.

씹던 껌 벽에 붙였다 다시 씹듯 씹고 또 씹는다.

그의 앞에서도 대놓고 핀잔하고 힐난하고 잔소리를 하지만

특히 내가 만나는 몇 안되는 지인들과 만나게 되는 날이면 

나는 아주 속풀이 아니 한풀이를 하듯 

그에 대한 불평 불만을 줄줄 늘어놓는다.


듣는 사람들이 지겹지도 않게 내 남자의 씹을 거리는 무궁무진 다양하다.


뒷담화 혹은 돌려까기.

내 사전에 그런 건 없다.

참을성이 부족한 나라 일단 앞에서 대놓고 깐다.

거기다 용서는 해도 잊지는 못하는 지라 씹은데 또 씹는 것도 잘 한다. 


그의 앞에서도 까고 그의 옆에서도 까고 그가 있든없든 까고 싶으면 깐다.

깐거 또 까기도 잘 한다.


그렇다고 내가 남 욕을 잘 하는 사람은 아니다.

몇 번은 참아주고 아니면 아예 안 보고 마는 성격인지라 다른 사람은 이렇게 씹지도 않는다.

불평 불만은 참다가 대놓고 이야기 하고 안고쳐지면 인연을 끊는다.

이제는 그 런게 편한 나이가 되어버렸다.

근데 이 남자만큼은 예외이다.

남 일엔 관심도 없는 내가 물고 뜯고 씹고 까는 이는 오로지 그, 단 한사람이다.

그렇다고 뒤끝이 있어 쪼잔하게 삐지거나 하지도 않는다.

까고 나면 그 때 뿐이고, 다시 생각나면 또 까고 그 뿐이다.

바뀌는 건 없다.


그러니 성질 착한 그는 언제나 기꺼이 씹혀준다. 먹혀준다. 물려준다. 까여준다.

그리고 내 그 지랄발광이 끝나면 웃으며 말한다.


"그렇게라도 니 맘 편하면 됐지. 오빠랑 사느라 네가 고생이 많아.

신나게 갖고 놀고 제자리에만 가져다 놔."


"제자리가 어딘데."


"어디긴 어디야, 네 옆이지."


그 대답 하나에 나는 또 방긋 웃는다.

새삼 그의 제자리가 내 옆이란 걸 알아주니 고맙고 기쁘다. 









사랑하는 전남편, 재혼하고 싶은 나의 동거남.

이렇게나 그는 내게 관대하다.


내가 말하는 그의 무능력함은 사실 다른 남자들에 비해 무능력한 게 아니다.

가정 경제 규모가 달라졌다.

없던 집도 차도 애도 셋이나 생겼다.

우리집 생활비가 신혼초 보다 4~5배는 더 들고 있다.

무능력하다기엔 그저 매달 소요되는, 필요금액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급발진을 잘한다.

그만큼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 나누는 대화가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 아이들은 부모라고 형제라고 져주지 않는다.

서로 지지않고 무조건 이기려고 들기 때문에 충돌은 불가피하다.

그리고 그는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절대 권력 아빠이다.

그래서 가끔 급발진을 한다만 아이들에게도 무척이나 관대하다.


그의 우직한 무심함은 천성이라 그 무엇에도 예외가 없고 늘 한결같다.

그리고 가끔은 츤데레인가 싶을 정도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날 챙긴다.

오늘만해도 프린트가 고장나서 동동거리는 내게 다가와

"너한테만 가면 남아나는 게 없냐." 하면서 뚝딱 고쳐주고 일을 갔다.

어제 저녁에 흘리듯 말한 건데 잊지 않고 해결해준 그가 고맙다.



지랄 맞은 나와 달리 관대한 그라서 나를 견딜 수 있는 것 같다.

참 다행스럽다.




이렇게 우리는 여전히 전남편 전부인, 동거인인 채로 2025년을 맞이했다.



결혼 10년만에 이혼을 했고 이혼을 지 5년차이다.

요즘 나는 재혼이 무척이나 하고싶다.

재혼을 핑계로 신혼여행 아니 재혼여행도 가고싶다.

결혼 10주년에 가려했던 하와이를 둘이서만 가고 싶다.


그는 꼭 가자고, 가면 된다고, 오빠가 데려간다고 말한다.


무슨 수로? 하고 대번에 되묻게 될 허무맹랑한 대답이지만

나는 또 그 한 마디를 믿고 좋다고 웃는다.


그렇게 나는 그는 우리는 2025년의 고생길을 힘차게 열었다.

그와 사는 동안 힘은 들어도 

나는, 그는, 아이들은, 우리는 모두 성장했다.

아무리 씹고 물고 뜯고 까도 우리는 조금씩 자랐다.

그래, 당신 말 처럼 신나게 갖고 놀다가 제자리에 가져다 둘게.



그러니 부디, 제자리를 지켜.

(요즘 험한 일이 하도 많이 생겨서인지 이 당연한 걸 소망하고 소원하게 된다.)




학교에서, 직장에서.

부메랑처럼

그도 나도 우리 아이들도 멀리 높이 나아가 신나게 자기 생활을 하고 

집, 이곳 내 품으로 돌아오길 바란다.

무탈히, 건강히 2025년동안 키우고 자라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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