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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영 Jan 21. 2020

파리의 온도는

씩씩한 척하는 쫄보의 파리 여행기

"보증금 있어요!'

한국인 남자친구를 뒀다는 호텔 직원 현지인 언니는 외국인이 한국어를 구사할 때 보이는 특유의 사랑스러운 억양으로 내게 말했다. 얼어있는 내가 고군분투하며 영어로 말하다가 이 한마디 한국말에 녹아내리는 순간이다. 


파리의 호텔은 대체로 방이 작다. 

매년 1300만 명의 관광객이 파리를 찾는다고 하니 이 도심에 관광객을 욱여넣으려면 크게 지을 순 없지 그래그래. 연말에 여길 왔으니 2019년 파리 총 관광객 수에 일의 자리 수 하나쯤은 내가 바꿨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 했지만 시계를 보니 이 도시에 도착한 지 2시간도 안됐다. 고국에 돌아가려면 6일 밤을 자야 한다는 사실에 다시 마음이 무게추를 진다. 

다행인 게 하나쯤은 있어야 인지상정이니 말해보자면, 호텔에 도착하니 또래 한국인 여자 두 분이 체크인을 하고 계셨다. 그리고 엘리베이터에서 인사를 나눴다. 순간 같이 다니자고 해볼까-는 생각이 들었다.


방에 들어와 트렁크를 내팽개치고 내가 왜 이렇게 겁을 먹었는지 생각한다. 성인이 된 후 이렇게 멀리 떠나온 게 처음이다. 제주도, 일본, 대만 등 가까운 나라, 동양인이 99%인 나라. 당연히 알아듣진 못해도 아시아 언어가 가져다주는 친숙감에 피로도 0%에 가까운 나라로만 여행을 다녔다. 


근데 여기는 다르다. 서방 국가 경험이 없는 나는 생각보다 쫄아있는 내가 제일 무섭다. 


아까 마트에 들렸을 때 계산대 앞에서 검은색 민무늬 지갑 속 동전을 꺼냈는데 캐셔가 그걸 보더니 웃더라. 

그 웃음은 말 없이 '동전 잘 꺼내기' 상황에 집중하고 있던 어떤 관광객에게는 적절치 못한 웃음이었다.

그리고 나는 쫄보니까.

웃음소리를 듣고 일부러 눈을 마주치기 위해 고개를 들었는데, 이 자식이 계속 웃고 있다. 


누군가를 귀여워하는 웃음과 이 웃음은 얼굴 형태에 있어 차이가 크다. 지금부터 묘사하는 웃음은 가히 '비웃음'에 가까우니, 거울로 웃는 얼굴을 연습하시는 분께 한번쯤 해보길 추천한다. 

눈은 동공이 보이지 않게 내리깔고 눈썹 한쪽은 이마 가까이로 올린다. 

입은 다물면 절대 안 되고 방향은 상관 없으니 한쪽 입꼬리를 귀로 가져간다. 

눈동자는 상대방보다 상대방의 행동을 주시한다. 

마지막으로 성대는 절대 가만히 있으면 안 되고 '츳-'소리를 내준다. 아 동시다발적으로. 


마트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신발가게니 수박씨니 하는 육두문자를 날렸다.


'이 새끼 나 한국에서는 성질 고약해~~!!!!!'라고 외쳐도 내 속만 불날 뿐이었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속에 불 지르는 말과 행동들을 마주했다. 파리에 사는 친구는 못 배운 놈들이니 싸그리 무시하라고 조언해줬지만 놈은 무시해도 당할 때마다 화가 나더라.


어쩌면 유럽에 대한 환상은 현실을 한 꺼풀 덮고 보기 위한 선글라스 정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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