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풍경에 기댄 나의 이야기, <풍경과 상처>
조지 오웰은 결국 모든 글이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목적’을 띈다고 했다. 모든 글은 ‘읽히기 위해’ 존재하고 그 글의 ‘목적이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자명한 결론. 이유 없이 무언가를 끄적여야만 했던 내가 정치적이었다니. 내가 정치라니! 문득 정치적이라는 말에서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내 글엔 문제가 없나. 나의 평론, 아니 감상이 정치적이라면 나는 어느 위치에 있는 것일까. 객관성의 유지를 지키지 못하고 몰입하기 일쑤라 전체의 흐름을 놓치기 일쑤인 내가 감히 어떤 작품을 평가할 수 있을까. 꼭 그래야 할까. 아니, 우선 그럴 수는 있는 걸까. 어떤 감상의 가장 첫 배출구인 SNS의 댓글을 보며 깨달았다. 그저 나는 작품을 극찬하거나 비판하여 더 읽히게 하거나 덜 읽히게 하고 싶었던 거구나. 먼저, 많이 읽은 자의 스웩, 깊은 취향, 그 취향에의 강요! (뭔지도 모르고 시작해 커져버린 것의 목표를 뒤늦게 찾아내는 경우는 의외로 잦다.)
하지만 문학을 구조적으로 비판하고 그 문학의 수준을 감히 평가하기엔 그것의 문법에 나는 무지했다. 그렇기에 난 작품의 수준에 대해 논하기보다 간접적으로 사유한 '누군가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극 중 주인공에 몰입할 수도, 그 반대 입장에 몰입할 수도 있겟지. 그런 방법으로 그 작품을 더 읽히게 만들 수 있다면, 나 자신을 인물에 빗대는 방법도 괜찮을 것이다. 부족한 문장을 가진 내가 설득력을 얻는 가장 적합한 방법은 (누구나 흥미와 적성, 재능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니) 내가 경험한 것으로'만' 이루어진 진실만을 토해내는 일이라 믿는다. 그래서 이렇게, 지나간 사랑을 쓴다. 여름의 풍경에 기대어.
계절에 연상되는 풍경이 있다. 그 풍경이 얼마나 찬란한가에 따라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라 부를 만한 것이 생기는 것이고, 반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에게 여름은? 단연코 가장 싫다! 오이만큼 싫어하는 더위는 둘째 치고 그보다 더 혐오하는 벌레가 창궐하는 시기. 그런 나에게도 여름을 기억할 때 떠오르는 단 하나의 풍경이 있다. 첫사랑과 떠난 여행, 그 풍경의 찬란한 조각들. 너무나 찬란하여 영화 속 장면이라는 진부한 문구로 설명할 수도 없을 그 압도적 찬란함. 그 여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여름의 풍경을 선물받았더랬다.
"나에게, 풍경은 상처를 경유해서만 해석되고 인지된다. 내 초로의 가을에, 상처라는 말은 남세스럽다. 그것을 모르지 않거니와, 내 영세한 필경은 그 남세스러움을 무릅쓰고 있다. 풍경은 밖에 있고, 상처는 내 속에서 살아간다. 상처를 통해서 풍경으로 건너갈 때, 이 세계는 내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그때 새로워진 풍경은 상처의 현존을 가열차게 확인시킨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이다. 언어는 마치 쑥과 마늘의 동굴 속에 들어앉은 짐승의 울음처럼 아득히 우원하여 세계의 계면으로 떠오르지 못하고, 이 세계가 그 우원한 언어의 외곽 너머로 펼쳐져 있는 모습이 내 생애의 불우의 풍경이다.” 서문, 모든 풍경은 상처의 풍경일 뿐 중, <풍경과 상처>, 김훈
크거나 굳기에 나답지 않은 결심의 계기는 대부분 사소한 우연에서 비롯된다. 우연히 시간이 맞아 보게 된 영화 <김종욱 찾기>를 봤을 때부터였을까. 아니면 그 이후 김종욱을 곱씹어볼 때? 소설 <김종욱 찾기>를 읽고 나서? 어찌됐건 고등학교 때부터 짝사랑하던 그녀를 끝끝내 다시 만난 우리 운명의 키워드는 당연히 ‘첫사랑’이었다. 무덤까지 갈 사랑을 경험 중인 남자와 빛나는 낭만을 꿈꾸는 여자, 그리고 불타올랐던 당시의 우리. (이열치열이라는 말을 무지에서 비롯된 언어유희 정도로 여겼지만 당시의 나에게 용광로가 대수였겠는가.) 그런 것들이 ‘여행을 갈 바에 우리끼리 더 맛있는 거 먹고, 더 좋은 걸 선물하고, 더 재밌게 노는 게’ 낫다고 믿었던 우리를 그 이름도 생소한 ‘인도'로 이끌었을 것이다. 결코 예측할 수 없던 여행이어서 압도적인 풍경을 선사할 수 있던 걸까. 찬란한 기억의 진실은 언제나 모호하다. 하지만 지금도 ‘인도 여행’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고생했고, 다신 가지 않을 곳이라 오늘도 (실은 떠오를 때마다) 굳게 다짐하지만, 당시의 사소한 우연, 그리고 그 연결고리에 감사하고 또 감사하게 될 줄은 결코 몰랐다.
가끔 인도에서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그 사진 속 그녀는 이미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풍경만으로 내 상상력은 극대화된다. 시각의 청각, 후각, 촉각화. 언제나 소란스러웠던 타인의 거리, 먼지 냄새와 뒤섞인 희미한 향신료의 공기, 그리고 50도에 육박했음에도 항상 끼고 있던 끈적거리는 깍지의 감촉. 더 이상 재현할 수 없는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로만 존재하게 되는 걸까. ‘처음’이어서 애틋했지만 결국 끝나버릴, 그로 인해 앞으로 만날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해 가장 큰 고정관념을 안겨다 줄 거대한 처음의 상처. 이것은 결국 ‘그 상처 속에서 재편성되며 새롭게 태어나며’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동안에도 나를 지배하게 될까. 아니다. 상처여도 좋다. 상처여서 좋은 것이다.
우리도 결국 보편적인 첫사랑처럼 보편의 종말을 맞이했다. 유일한 첫사랑의 보편적 종말! 서로의 안부조차 확인할 수 없는 남남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첫사랑이 아름다운 이유로 그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회의적인 첫사랑관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분히 현실적이기에 찌질한 세속의 사랑이 가장 순수했을 그 때, 게다가 머릿속에서 각색과 각색을 거쳐 가장 아름답게 기억할 그 기억을 어떻게 이기겠냐는 비관적인 사랑관으로 내 첫사랑의 ‘진짜 깊이’를 비하하고 싶은 것도 아니고. 비록 서로 못 볼 꼴을 보며 헤어졌지만, (그리고 정말 힘들었지만) 덕분에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근 지 한참이나 된 이번 여름이지만. 그래도.
흐드러지게 만개했던 꽃 같은 사랑은 끊임없이 변주된다. 메말라 부서질 수도, 가지만 앙상한 채 황폐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인생처럼, 사랑 또한 나아가지 말아야 할 백 가지 이유에 선행하는 한 가지 풍경 때문에 나아갈 수 있는 건 아닐까. '인생과 사랑은 그런 힘으로 흐른다', 고 나는 오늘도 소리내어 다짐해본다.
취향강요 주관독서 #2 <풍경과 상처>, 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