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견적서에 '정가' 대신 '시가'가 적히는 합리적인 사정
디자인 업계에는 '돈' 이야기를 꺼낼 때
기묘한 기류가 흐른다.
서울이나 대기업의 시스템은 조금 다를지 모르겠으나,
내가 뿌리내린 지방 도시에서 느끼는 공기는
유독 더 묵직하다.
여기에 더해 당혹스러운 점은 디자인 비용이 너무
낮게 책정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짜장면값은 오르고 최저시급도 바뀌는데,
디자인 예산만큼은 유독 시간이 멈춘 듯 제자리걸음이다.
"포스터하고 배너 몇 개만 하면 되는데, 얼마예요?"
"다른 곳은 하루 만에 나오고 엄청 싸던데!" (그럼 왜 저를 찾아오셨나요…?)
"가격이 매번 다른 거예요? 정찰제면 좋을 텐데…."
듣고 보면 꽤 그럴듯한(?) 의문이다.
왜 디자인 회사마다, 시기마다 금액이 다를까?
소비자 입장에서는 정해진 가격표만큼
명쾌한 기준이 없을 텐데.
나름의 일리 있는 물음표 앞에서
나 또한 한때는 말문이 턱 막히곤 했다.
'그러게, 왜 디자인은
편의점 컵라면처럼 가격표를
딱 붙여놓을 수 없을까?'
고민 끝에 내린 독립 디자인 스튜디오
운영 2년 차의 답변을 정리해 본다.
똑같은 포스터 한 장이라도 '무엇을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공정은 천차만별이다. 단순히 정보를 보기 좋게 재배치하는 작업과, 고난도의 3D 그래픽을 새로 창조하는 작업은 투입되는 기술과 시간부터 다르기 때문이다. (AI가 나왔으니 간단하잖아라고 말하고 싶다면 기다리시라, 곧 관련 글을 작성할 테니) 여기에 시안의 개수, 웹용인지 혹은 인쇄 공정이 포함되는지, 규격과 수량은 어떠한지 등의 변수가 더해지면 동일한 조건의 의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프로젝트가 각기 다른 고민을 담은 '100% 맞춤 제작'인 이상, 기성품 같은 정찰제를 적용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개인적으로 최선의 결과물을 위해 한 달에 진행하는 프로젝트 수를 관리 가능한 수준(3~4개 내외)으로 유지하려 노력한다. 클라이언트는 단순히 완성된 작업물 하나를 건네받는 것이 아니라, 그 작업을 위해 다른 의뢰를 뒤로하고 확보해 둔 디자이너의 창의적인 에너지와 집중 시간을 점유하는 셈이다. 공장식 대량 판매가 목적이 아니기에 기성품 가격표를 들이미는 건 오히려 성의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메인 포스터 한 장이 완성되었다고 해서 SNS 카드뉴스, 가로형 현수막이 자동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매체마다 최적화된 레이아웃과 가독성의 문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단순히 늘리거나 줄이는 게 아니라, 각 규격에 맞춰 디자인 요소를 새로 배치하고 조합하는 재설계 과정이 필요하다.
규모가 큰 프로젝트나 전공 밖의 영역(영상, 촬영 등)이 포함될 땐 신뢰하는 동료 전문가들을 섭외해 팀을 구성한다. 여기엔 당연히 시간과 외부 전문가 섭외 비용이 소요된다. 투입되는 인원과 에너지가 과업마다 다른 상황에서 정찰제를 유지하기란 무리가 있다.
데이터만 전송하고 끝나는 작업과 실물을 제작하는 작업은 무게감이 다르다. 수백만 원어치 인쇄물이 통째로 폐기되거나 재인쇄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은 디자이너를 늘 팽팽한 긴장 속에 둔다. 제작 수량이 늘어날수록 사고에 대한 책임의 부담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커지기에, 견적서의 숫자는 디자이너가 밤잠 설쳐가며 오탈자를 들여다보는 그 지독한 검수 노동에 대한 '보험료'를 포함하게 된다.
급행비는 무례에 대한 벌금이 아니라 우선순위를 조정하기 위한 '기회비용'이다. 다른 업체와의 약속을 뒤로 미루고 잠을 줄여 마감을 앞당기는 일에는 마땅한 대가가 따른다. 디자이너 또한 공정 순서를 앞당겨 와야 할 때 인쇄소에 급행비를 지불한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유한하며, '빠름'은 디자인 시장에서도 엄연히 유료 옵션이다.
입장 바꿔 생각해 보면 답은 의외로 명확하다. 명확하고 빠른 답변으로 최소한의 피드백을 주는 클라이언트가 있는가 하면, 추상적인 지시로 지난한 수정 마라톤을 하게 한 뒤 결국 "역시 처음 게 좋네요"라는 말로 디자이너를 허탈하게 만드는 이도 있다. 디자이너의 시간을 아껴주는 클라이언트에게 기꺼이 다음 프로젝트 예산을 조율하거나 서비스를 얹어줄 유연함이 생긴다. 결국, 클라이언트의 태도가 견적서의 숫자를 바꾸는 셈이다.
간혹 ‘가격은 정찰제, 수정도 무제한’ 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클라이언트를 만난다. 나는 그에 맞는 공장형 디자인사를 찾아보시길 정중히 권해드리는 편이다. 그것은 클라이언트의 예산과 목적에 맞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템플릿으로 회전율을 높이는 곳과 고민과 선호를 나누고 비주얼 합을 맞춰가는 독립 스튜디오는 서비스의 목적지 자체가 다르다. 디자인에 정찰제가 존재할 수 없는 이 사소하고도 확실한 이유들이, 클라이언트에게 견적서 속의 숫자가 아닌 '그 너머의 노력'으로 읽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