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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평언저리 Jan 25. 2023

영화와 영상과 문자라는 삼박자

<기관총부대>.1963 - NOW YOU SEE ME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보통의 영화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아주 분명하다. 재밌는 서사와 탁월한 연출이 거기 그 스크린에 있기를 바란다. 기대값이 얼추 들어맞기를 바라는 마음에 우리는 돈과 시간을 지불한다. 미모의 배우, 재능 있는 감독, 흥미로운 서사. 이 삼박자가 스크린에서 생생히 활동하길 바란다. 로맨스라면, 한 쇼트에 아름다운 여자 배우가 있고 그 다음 쇼트에 그녀를 쳐다보는 미남 배우가 있다. 다음 쇼트에서 그들은 격렬한 키스를 하거나 이별을 맞이한다. 액션이라면, 한 쇼트에 주인공이 총을 겨누고 그 다음 쇼트엔 악당이 피를 흘린 채 웃고 있다. 그 다음 쇼트에선 모두가 바라는 액션극이 박진감 넘치는 속도로 펼쳐진다. 영화에 대해 우리가 품는 기대는 일반적으로 그 영화의 장르와 얽혀 있다. 어떤 예술을 불문하고 장르는 한 사람이 가지게 되는 막연한 기대감에 뚜렷한 선을 긋는다. 로맨스를 향한 기대와 SF를 향한 기대는 다르다. 역사극을 향한 기대는 코미디를 향한 기대와 다르다. 특정한 장르로 확실하게 나뉘는 영화는 그 기대를 충족시켜주고 관객들을 집에 보낸다. 한 영화에 다양한 기대를 갖고 떠난 몇백 척의 배가 당도할 수 있는 단 두 곳. "만족했어." 혹은 "실망스러웠어." 대다수는 여기서 더 긴 여정을 택하지 않는다. 소수의 몇 명만이 그 영화에 대한 글을 쓰면서 진전을 시도하지만 결국 포기한다. 그 이유는 자기 재량도 있겠지만 서사적 한계, 연출 부족이란 한계 혹은 더 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영화 자체에서 느껴지는 얄팍함이 그 이유가 된다. 영화 자체로써 실패한 영화는 "만족했어"와 "실망스러웠어"라는 두 곳을 최종 목적지로 두고 무작정 달린 영화다. 

장 뤽 고다르의 <기관총 부대>는 그 제목을 들으면 단번에 전쟁 영화라는 확신을 갖는다. 필자는 이 영화를 어떤 줄거리나 소개도 없이 무작정 봤다. 전쟁 영화를 보기 전에 갖는 기대감은 다른 장르와는 결이 다르다. 흘러나오는 피와 찢겨나가는 살점이 감상 목적인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전쟁 영화라면 비단 총살과 발포에서 나오는 박진감과 더불어 살생당하는 그 광경의 처참함을 목도하면서 우리가 느낄 수 밖에 없는 어떤 죄책감과 윤리적인 불편함이 따라온다. 이것을 무시할 수 없는 환경에서 우리는 지금 전쟁 영화를 본다. 아슬아슬한 윤리적 심판대 위에서 물론 전쟁이란 장르에 우리는 어떤 기대감을 갖는다. 한 영웅의 탄생, 몰살 당하는 (절대적인 악으로 재현되는) 적군, 허무한 살생의 결과는 그것이 시작부터 의미가 없었다는 반전 메시지. 

 

한 마을에 나타난 군인들이 두 소년에게 자원 입대를 제안한다. 순진한 그들은 전쟁이 나면 무엇이든 맘대로 할 수 있다는 사탕발림에 넘어가 참전을 한다. 전쟁이 시작되고 말 그대로 무법자처럼 활개치던 그들은 아무 소득 없이 귀향한다. 마지막에 그들은 입대를 제안했던 군인에게 총살 당한다. 이야기는 이렇게 끝난다. 

  <기관총 부대>가 상영된 시기의 프랑스를 보면 이 영화에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내포됐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그렇게 평가하는데, <기관총 부대>가 정치 이전에 영화라는 예술 자체를 다시 사유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특이한 작품으로는 볼 수 없을까. 필자는 이 영화에서 보통의 영화 감상법과는 다른 방식을 유도하는 손짓을 보았다. 

<기관총 부대>에서 정보를 전달하는 매개체는 세 가지로 나뉜다. 주인공들이 전면에 나오는 영화. 발발해버린 전쟁의 참상을 자료 화면처럼 보여주는 저화질 영상. 그리고 영화 속 주인공들이 마을에 있는 소녀들에게 보내는 편지, 즉 문자. <기관총 부대>는 이 세 매개체가 종합된 작품이다. 첫 번째 매개체인 영화를 보자. 각기 총을 장착한 두 소년은 마을 주민들을 괴롭힌다. 전시 상황에 맞먹는 어떤 분위기가 흐르지만 두 소년이 실제로 적군을 죽이거나 대면한 씬은 없다. 그들이 가는 어떤 곳은 건물이 무너져 있지만 죽어 널브러진 시체나 노숙하는 이는 보이지 않는다.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전후(戰後)의 이미지가 '영화'에 없다. 이 영화를 보는 중간에 우리는 질문할 수 있다. 과연 그들은 전시 상황에 있는가? 

  두 번째 매개체인 영상을 보자. <기관총 부대>에서 우리가 얼핏 떠올리는 전쟁의 이미지는 '영화'가 아닌 '영상'에 있다. 마치 역사 교육 방송의 자료화면처럼 담긴 이 영상 조각들엔 '영화'에서 두 소년이 접하지 못하는 참상을 담고 있다. 고다르는 상반된 분위기의 두 매개체를 서로 만날 수 없게 만들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행하는 장난질에 비해 '영상' 속 전쟁은 그 이미지에 철저히 부합하는 안타까운 장면의 총집합이다. 

  우리가 불현듯 떠올릴 수 있는 전쟁이란 이미지의 근원은 어디에 있나. 다시 말하면 그 이미지가 자연히 소환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에서 말한 로맨스가 성립되기 위한 쇼트는 미모의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쳐다보며 나누는 격렬한 키스(혹은 이별). 액션극이 성립되기 위한 쇼트는 악당을 물리치려는 주인공의 쇼트와 그를 죽이려는 악당의 리버스 쇼트의 결합, 그 이후에 성사되는 생생한 액션 시퀀스다. 전쟁 영화가 성립되기 위한 쇼트는 무엇인가. 단순히 생각해 보자. 총을 든 주인공과 그 옆에 줄줄이 엎드려 있는 아군 쇼트. 그 다음 똑같이 반격을 준비하는 적군의 리버스 쇼트가 있을 것이다. 흔히 장르물로 소비되야 할 영화 속 쇼트들의 결합엔 공식이 있다(이 공식의 발명가는 감독과 제작사와 관객들이다). 이 공식 안에선 장르의 경계를, 장르에서 갖게 되는 기대감의 경계를 넘나들지 말아야 한다. 전쟁 영화라면 그 장르에 맞는 쇼트들을 찍어 맞붙여야 한다. 이 연결된 각 쇼트들. 총을 쏘면 그 총에 맞고 시체가 되는 적군의 모습이 흔히 답습되는 그 쇼트의 결합이 전쟁의 이미지가 된다.    

고다르는 <기관총 부대>에서 전쟁의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이미지가 아닌 현실에서 발생하고 남은 '영상'의 이미지다. 시체, 붕괴된 건물, 총격. '영화'에서 볼 수 없는 전쟁이라는 이미지에 부합하는 장면은 실제 '영상'에 있다. 근데 이것은 이미지가 아닌 현실이다. '영상' 속 전쟁은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다. 그것은 머릿속에 어렴풋하게 떠올려지는 잔상이 아니다. 그것은 재현하라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벌어진 실재가 재현의 예술인 영화에 침입했다.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죄책감? 


세 번째 매개체인 문자를 보자. 참전한 소년들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두 소녀가 있다. 소년들은 두 소녀에게 편지를 보낸다. 전시 상황에 벌어진 모든 일을 마치 중계하듯 낱낱이 적어내려간 그 문장들을 관객도 읽는다. 조금 이상하다. '영화' 속 그들은 전시 상황을 가장해 장난질을 하지 않았나? 어째 그들이 쓴 편지엔 '영화'와 상반된 분위기가 읽힌다. 편지만 보면 그들은 목숨을 건 혈투를 벌이는 용사 같다. '문자' 쇼트와 함께 들리는 거대한 총소리는 그런 느낌을 배가한다.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영화'? '영상'? '문자'? 근데 이 세 매개체는 각기 분리되어 있는가. '영화'와 '문자'의 결합을 믿어야 하는가. '영화'와 '영상'의 결합을 믿어야 하는가. '영상'과 '문자'의 결합을 믿어야 하는가. 아니, 소녀들에게 보낸 그 편지의 발신자가 소년이 아닌 참전용사일 수도 있다. 쇼트와 쇼트의 결합이 아닌 '영상'과 '문자'의 결합으로 보면 이 가설은 충분히 가능성 있다. 물론 '영화' 속 소녀는 이런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지만. 그녀는 편지를 읽고 말 뿐이다. 


<기관총 부대> 중반에는 이상한 시퀀스가 있다. 전쟁 도중 영화를 보러 간 소년이 영화관에서 벌이는 기행이다. 그가 보고 있는 영화 속의 여자는 전라 상태로 화장실에 들어가 욕조에 몸을 뉜다. 난생 처음 영화를 본 소년은 그녀의 신체를 자세히 보려 의자에서 일어나기도 하고, 아예 관객들은 신경도 안 쓰고 이리저리 몸을 움직인다. 하다못해 직접 스크린 위에 올라가 스크린 속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살피지만 그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 결국 그는 스크린을 고장낸다. 

  실재가 아닌, 스크린 이미지 속에서 실재를 보고 싶다는 욕망은 실패로 끝난다. 그건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미지는 창작자가 의도한 한 폭의 세계일 뿐 결국 실재를 보여줄 일은 만무하다. 그 가공된 세계에서 마치 실재를 보여줄 것처럼 으스대는 작품은 빛 좋은 개살구다. <기관총 부대>는 영화라는 이미지 예술의 한계를 인정함으로써 나온 영화다. 그래서 고다르는 '영화'에서 전쟁 영화가 가지는 마땅한 쇼트를 넣지 않는다. 전쟁의 재현은 전쟁을 우상화를 낳는다. 전쟁의 재현은 그 재현을 더 보고 싶어하는 욕망을 낳는다. 고다르는 '영화'로 재현하는 대신 '문자'로 표기한다. 쇼트와 쇼트의 결합으로 전쟁 영화의 장르성을 충실히 담아내는 대신 '재현된 전쟁'을 보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을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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