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을 기억하기에, 경험에 제한을 둔다는 에르난(엘킨 디아스 분)의 말은 인상적이다. 기억력에는 한계가 있어야 한다. 망각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 눈으로 본 현실의 편집본을 가질 수 없다. 그는 4시 59분에 지나간 승용차의 번호를, 분식집 앞에 있는 구겨진 쓰레기 봉투의 주름의 수를 기억할 것이다. 기억의 편집권은 시간만이 쥐고 있다. 24시간의 대부분이 가위질 당하는 우리와 달리 에르난은 시간의 굴레에 갇혀 산다. 편집되지 않은 24시간 분량의 필름은 에르난이 떠안아야 할 짐이다. 편집 못할 시간의 종합은 가치 없는 짐이고 그래서 에르난은 세계와 담을 쌓는다.
오프닝에서 제시카(틸다 스윈튼 분)는 잠을 자던 중 기현상을 겪는다. 쿵, 하는 소리가 그녀의 잠을 깨운다. 제시카는 자신에게만 들리는 정체 모를 소리의 형태를 복구하고자 믹싱 프로듀서 에르난(첫 문단에 쓴 에르난과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다. 물론 제시카는 망각하는 사람이기에 그 소리의 정확한 형태를 이전에 경험한 상태 그대로 구현할 수 없다. 단지 살아있는 기억과 그때의 감각을 총동원해 비슷한 것을 창조할 뿐이다. 이 수고로운 작업은 헛고생이 되는데, 제시카의 귀에 다시 한 번 쿵,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단 한 번만 겪기에 기현상인 줄 알았던 쿵, 소리는 그녀의 일상이 된다.
보통 사람은 한 번에 두 가지를 볼 수 없다. 방 내부로부터 등을 돌려야 창밖을 볼 수 있다. 헤드폰을 끼고 있다면 뒤에서 바람에 부대끼는 나무를 볼 수 없다. 또 우리가 사는 현실은 우리가 꾸는 꿈과 다른 차원에 있어 두 공간을 동시에 경험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오프닝으로 돌아가면, 영화는 잠에서 깨는 제시카로 시작한다. 그녀는 비(非)-숙면 상태로 이리저리 돌아다닌다(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시카는 잠을 자지 않는다). 배회하는 나날이 이어지면서 그녀가 서 있는 공간에 변화가 생긴다. 믹싱 프로듀서 에르난의 행방이 묘연해진다. 그의 동료 직원들은 에르난의 존재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녀는 별 소득 없이 돌아간다. 그때 강가에서 고기를 손질하는 남자 에르난을 만난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경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은둔 생활을 한다. 그는 잠을 잘 때 꿈을 꾸지 않는다. 잔디밭에 누워 숙면을 취하는 그는 왼쪽 손을 가슴에 얹고 떠진 두 눈은 하늘을 본다.
24시간을 기억하는 그에게 꿈 속에서의 경험은 전무하다. 에르난에게 숙면은 어떤 시간에 속할까. 꿈의 세계를 살지 못하고 현실만을 사는 인간은 창밖을 보기 위해 방 내부로부터 등을 돌린 자다. 현실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은 그 이면의 세계를 접할 수 없는 비애를 낳는다. 꿈이라는 시공간에 참여함으로써 얻는 새로운 감각을 에르난은 느낄 수 없다. 비약적으로 한쪽 감각이 발달한 대신 다른 쪽 감각을 잃은 사람이다.
제시카와 (고기를 손질하는) 에르난의 만남 이후, 롱테이크로 이어지는 둘의 대화를 보다 에르난이 숙면에 빠지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감독은 쇼트를 바꾼다. 풀밭에 앉아있는 그들의 앞모습을 찍던 카메라가 자리를 바꿔 그들의 뒷모습을 찍는다. 관객은 그때 여태까지 볼 수 없었던 강물을 본다. 에르난이 꿈 없는 잠에 빠질 때 관객은 또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제시카는 우리와 함께 깨어있다. 에르난에게 숙면이 눈 앞의 현실을 모른 체 하기 위한 수단이라면, 우리에게 숙면이란 다른 세계로의 예정 없던 여행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또 다른 눈을 뜬다.
앞서 말했듯 창 밖을 보는 동시에 등 뒤로 펼쳐진 방의 내부를 볼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창밖을 보는 동시에 방의 내부를 떠올릴 수는 있다. 그건 어떻게 가능할까. 방의 내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이름 그대로 <메모리아>는 기억에 관한 영화다. 한밤중에 들은 쿵, 소리를 구현하기 위해 제시카는 (믹싱 프로듀서) 에르난의 도움을 받지만 그는 제 모습을 감춘다. 동료가 사라지고 그녀는 이제 쿵, 소리를 자기 기억에 의존해야 한다. 그가 사라진 이후 또다시 들려오는 쿵, 소리에 제시카는 귀를 기울인다. 소리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땅 밑으로 천천히 몸을 숙인다. 쿵, 소리에 대한 제시카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다. 기이하고 섬뜩한 소리를 두려워하던 그녀는 (믹싱 프로듀서) 에르난의 부재 이후 쿵, 소리와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하나 신기한 점은 제시카는 이 낯선 소리를 통해 자신이 발 닿고 있는 공간을 의심한 적이 없다. 보통 이런 기현상을 체험하는 영화 주인공이라면 이 세계가 현실인지 꿈인지 궁금해 하는데, 제시카는 그녀에게 생기는 어떤 불가사의한 일들을 의심하지 않는다. (믹싱 프로듀서) 에르난이 왜 사라졌는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자신에게만 들리는 쿵, 소리에 오히려 더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하는 지금 이 공간에 대한 의문 또한 없다. 그저 이 공간을 살아갈 뿐이다. 여기서 들려오는 이 소리를 기억하고자 하는 의지만이 있을 뿐이다.
앞서 말했듯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볼 수 없다. 한쪽으로 시야가 온전히 틀어져있다면 반대쪽은 당연히 시야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다. 하지만 창밖을 보면서 방 내부를 같이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바로 창문 가까이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제 1공간인 방과 제 2공간인 창밖의 경계가 사라지기 위해 사용해야 할 감각은 시각이 아니라 청각이다. 제시카는 영화 처음부터 그렇게 했다. 영화 말미에 창문 바깥으로 시선을 주는 대신 그녀는 귀를 댄다. 관객은 그때 쿵, 소리의 기원을 목격한다.
그 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UFO지만, 여기까지 읽은 독자라면 크게 개의치 않을 것이다. <메모리아> 속 공간은 현실과 꿈의 이분법이 무효한 곳이다. 두 눈을 통해 사라져가는 UFO의 꽁무늬까지 봤지만 여기서 현실 속 비현실을 겪는다는 어떤 체험의 감각을 느끼진 않는다.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이 무의미하니까.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시공간적 감각을 완전히 무(無)화시켜버린다. 대신 청각의 가능성을 열어젖힘으로써 새로운 영화적 경험을 선사한다.
<메모리아>의 마지막 쇼트들에선 동네의 풍경을 보여준다. UFO 출몰 이후의 풍경이다. 영화를 보고 극장을 나온 우리는 다시금 시공간에 갇혀 살아야 하는 존재다. 하지만 거기서 잠시 빠져나와, 시공간의 압박을 조금은 덜 느끼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한 감각의 새로운 가능성을 터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