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일드 차일드>.1970 - NOW YOU SEE ME
*다량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평론가로 두각을 드러낼 때부터 일관된 기준의 영화관(觀)을 가지고 있었다. '영화 감독은 작품을 통해 자기의 인생과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 대중성과 돈에 타협하는 대신 개인적이고 비타협적인 영화를 만든 소수의 감독(로셀리니, 프리츠 랑, 부뉴엘, 장 르누아르 등)은 영화평론가이자 평론계의 앙팡 테리블(무서운 아이)인 트뤼포로부터 평생 찬양 받았다. 영화를 대하는 그의 태도는 감독이 되기 전 평론가 시절에 이미 구축된 상태였다.
영화감독이 된 트뤼포가 처음 제작한 장편영화는 <400번의 구타>다. 평론가 시절부터 일관되게 지켜온 영화적 태도를 그는 첫 작품에 고스란히 녹였다. 불우했던 자기 유년시절의 기억을 이미지로 되살려낸 이 영화는 트뤼포 세계의 근간이 된다. 도망가고 정착하고 이동하고 머무르는 주인공은 스스로 일을 벌이거나 외부에서 틈입해오는 위협을 피해 달아난다. <400번의 구타>의 어린 주인공 앙트완은 보호 시설에서 탈출하지만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 <부드러운 살결>의 피에르는 승무원 니콜에게 빠져 가정을 팽개치고 달아나지만 아내의 총에 맞아 죽는다. <화씨451>의 몬태그는 책을 불태우는 디스토피아에서 소방관으로 근무하지만 이내 탈출을 감행한다. <비련의 신부>의 줄리는 결혼식날 자기 남편을 죽인 사람들을 한 명씩 제거해가는 여정에 뛰어든다. <도둑맞은 키스>의 앙트완은 트뤼포의 인물들 중 가장 희망적인 엔딩의 주인공이 된다. 군대에서 쫓겨나고 일자리에서도 쉽게 해고당하던 그는 인연을 만나 사랑을 나누고 안정된 일자리까지 얻는다. <미시시피 인어>의 마헤는 자신이 의뢰를 요청했던 사립탐정에게 도리어 쫓기는 신세가 되자 그를 죽여버린다. <부부의 거처>의 기혼남 앙투안은 일본인 여성과 사랑에 빠진다. 물건을 훔치고, 유치장 신세를 지고, 매음굴에 가고, 탈영을 해 붙잡히는 인물들의 삶의 바탕엔 트뤼포가 지나온 삶이 있다. 그에겐 영화과 곧 삶이었고, 그의 삶은 정착과 방황의 연속이었다. 정착과 방황을 지속하는 인물이 트뤼포 영화의 중심이 되는 이유다.
<부부의 거처> 다음 작품인 <와일드 차일드>는 그간 만들어진 그의 영화들과는 조금 다른 선상에 있다. 숲에서 동물처럼 살던 야생인간 빅터를 데려온 이타르 박사가 인간 사회에 그를 적응시키기 위해 교육하는 과정이 영화의 전부다. '정착과 방황'이라는 트뤼포 영화의 연결고리에 맞추면 빅터는 인간 세계에 정착하기 위한 과정에 있다. 중요한 점은 <와일드 차일드>는 여타 작품들과 달리 방황하는 인물이 아닌 그 인물을 돌보려는 자의 시선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이전 작품들에선 볼 수 없었던 '보호자'의 등장. 누구는 이타르 박사를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실제로 불행했던 어린 트뤼포를 적극적으로 지원해준 이가 바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야생인간 빅터를 어린 시절의 트뤼포에 비유할 수 있지만, 너무 쉬운 해석이다. 그것보다도 필자의 궁금한 점은 전작들과 다른 결의 인물을 세운 트뤼포의 결정에 있다. 왜 그는 '떠돌이'가 아닌 그 떠돌이를 보살피는 '보호자'의 시점을 취했나.
그전에 이 말을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이전 작품인 <부부의 거처>는 범작 수준에도 못 미친다. 장르적인 쾌감도 트뤼포만의 매력도 모두 사라지고 어딘가 겉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급작스런 서스펜스의 난입과 영화의 변곡점인 불륜 로맨스를 깔끔하게 맺지 못하는 어설픔이 트뤼포 답지 않아 실망스러웠다. 이 다음 작품인 <와일드 차일드>는 그에 비해 차분한 분위기를 띄고 있다. <부드러운 살결> 이후 오랜만에 흑백 연출을 사용했고 어설픈 서스펜스나 로맨스 장르도 넣지 않았다. 그의 이전 흑백 영화인 <400번의 구타>와 <부드러운 살결>과 비교했을 때 이 영화의 흐름은 주인공들의 액션을 빼면 정적이다. 트뤼포 답지 않은 절제된 연출은 관객으로부터 장르적인 변주를 기대하는 대신 오직 빅터의 성장에만 초점을 두게 한다. 그의 계획은 상당 부분 들어맞았다. 이타르 박사의 기대감을 필자 역시 가지면서 영화를 봤다.
이렇게 볼 수 있지 않을까. <와일드 차일드>는 트뤼포 자신이 한 발 물러서서 찍은 자신의 엑스레이(X-RAY)라고. <부부의 거처>를 실패작으로 여긴 트뤼포 자신이 창작자로서 느낀 회의감과 실망감을 이 영화에서 드러냈다고. 이타르 박사는 트뤼포 자신이고(이타르 박사를 연기한 인물이 트뤼포다. 이 영화는 이타르 박사의 일인칭 시점이고, 또한 감독 트뤼포의 배우로서는 첫 번째 장편 데뷔작이다) 빅터는 트뤼포에게 발견된 새로운 연구 대상이다. 이 대상감을 자기 영화에 맞게 개조시키려던 트뤼포(이타르 박사)는 <부부의 거처>라는 지리멸렬한 작품을 탄생시킨 비참한 결과를 낳는다. 영화에서 이타르는 빅터를 교육시킨 결과 몇 번의 성공을 맛보지만 대부분 안 좋은 결과를 맞는다. 빅터는 인간과 유사한 짐승일 뿐 사회로 나갈 수준의 인간성은 결여됐다. 트뤼포가 마주한 이 새로운 영감이란 자신이 길들이지 못하는 난봉꾼이자 자꾸만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연구 대상이다. 하지만 트뤼포는 실패했고 이타르 박사도 실패한다.
빅터는 이타르 박사의 집에서 탈출하지만 야생으로 돌아갈 용기를 잃는다. 그는 박사네 집으로 돌아간다. 이 또한 <와일드 차일드>의 이전 영화들과는 다른 점이다. 도망친 곳으로 되돌아가는 인물은 <와일드 차일드>에서 처음 나온다. 트뤼포의 인물들은 도망친 곳에서 멀어질지언정 그곳으로 회귀한 적은 없다. 그들은 곧 트뤼포의 분신이다. 빅터는 아니다. 빅터는 도망간 곳으로 다시 정착하기를 택한다. 돌아온 빅터가 자기 방으로 올라가는 쇼트로 영화는 끝난다. 빅터는 그곳에 '정착'할 수 있을까. 트뤼포의 대답과도 같은 엔딩. '모르겠다'. 빅터는 트뤼포의 분신이 아니니까. 다만 빅터는 어느 순간 그의 품에 다시 안겼을 뿐이다. 빅터에게 아버지는 이제 자연이 아니라 이타르다. 이타르는 그를 책임져야 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엔딩 속 빅터의 눈이 그렇게 말한다. 여기서 끝나는 영화. 망설이는 트뤼포. 이 한 순간의 망설임까지 트뤼포는 카메라에 담아낸다. 그는 새로운 시도를 하는 와중에 자신의 줄곧 읊어대던 영화적 태도를 버리지 않는다. 이 영화의 작품성과 대중적 반응이 어떻던 하나는 분명하다. 한 발치 먼 곳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어려운 작업을 할 때도 트뤼포는 진솔함을 잃지 않았다. <와일드 차일드>는 한 예술가의 책임의식을 분명히 느낄 수 있는 실험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