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호연 Sep 23. 2024

회피형의 현실직시에 관하여 II

어쩌면 이 세상에 영원이라는 건 없기에 행복한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세상에 영원이라는 건

없기에 행복한 걸지도 모른다.


나는 지독한 회피형이다.

살면서 회피형 인간들을 혐오하기도 했다.

내가 회피형인 줄 알고 있으면서도,

같은 회피형의 인간들을 혐오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편했어야 하는 집에서

편했던 적이 없는 듯했다.


집에서 자다가 어렴풋이 눈을 떴을 때,

딱 그 순간이 우리 집에서 가장 소란스러울 때다.


힘들게 눈을 뜨고, 힘든 일을 하러 나가는

내 가족들을 보면,

오늘은 또 어떤 힘듦을 안고 돌아올지

아주 잠시 상상했을 뿐인데

숨을 내쉬기 힘들 만큼 고요하고 쓸쓸하다.


눈을 뜨고 서로를 바라보며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부지런하고 요란스럽게

내일을 위해서, 그다음 날을 위해서

준비하는 부모님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한다는 것이,


힘든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식사시간 2시간 내지 3시간 동안만

우리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내 사람들이

오늘 하루가 이랬고 저랬다며

앞으로 우리가 환원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어쩌면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힘들어야 한다는 것을


내 열린 귀가 듣고,

보이는 대로 내 눈은 그들을 살피고

안타까운 한숨만이 정적을 깬다는 것이

내 마음을 엉망으로 만들어놓는다.


그 순간은 꼭 절망스러워서 마음을 찢어놓고

마음을 조각내어 알아볼 수조차 없게 만든다.


우리의 원죄가 무엇이길래

속죄가 이리도 쓰리고 아릴까.

우리가 무얼 잘못했길래

이토록 아파해야 하는 걸까.


하루라도, 정말 단 하루라도

마음도 생각도 비울 수 없는 걸까

一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서둘러,

우리가 모여서 대화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에서 탈출해서는,

사람온기 따위 느껴지지 않는 작은 방에 들어간다.


그들은 모른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만큼

그들을 온전히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내가 아픈 만큼 당신들도 똑같이 아팠다는 사실을

줄곧 알고 있었다는 것을.

늘 헤아리고 함께 아파했다는 것을.


당신들은 모른다.

내가 가장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이

우리가 다 같이 모인 순간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면 우리가 행복할 수 있을까?

내가 어떻게 해야 우리 가족에게

행복을 느끼게 할 수 있을까?


당신들은 말한다.

그저 살아있어주기만 해도 행복하다고.

/

처음에는 내 딸이 잘 살기를 바랐다고 했다.

당신이 겪은 힘듦을

내 딸은 느끼지 않기를 바랐다고.


당신이 이 세상에서 봤던 무언가를,

듣고 직접 느껴봤던 무언가를

공감하는 순간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고.


하지만,

내 딸이. 소중한 내 딸이

세상을 등지려 하는 순간을 마주했을 때


"아, 살아있어주기만 해도 충분한 거였구나." 하고는 깨달았다고.

/

어쩌면 모든 것은 결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나는 그렇게 정의하고 우리의 불행이 머지않아 그치기를 기도했다.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게 해 주세요.

엄마가 아픈 순간이 영원하지 않게 해 주세요.

아빠가 힘든 짐을 이제는 내려놓게 해 주세요.

내 언니의 방황이 영원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고 나의 방황이, 나의 아픔이, 나의 짐이

전부 영원하지 않게 해 주세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은 언제나 새롭다.

몇 달동 안이나, 몇 년동안이나

보고 느꼈던 현실 속에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그런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하나였다.


또다시 외면하고 있었다.


직면하는 일은 언제나 새롭고,

고통스럽다. 내가 견뎌내야 하는

 고통의 한계가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견뎌내야 하는

통의 한계는 보이는가 묻는다면

..

.

글쎄, 다 지나간다고

무책임하게 이야기하는 수밖에.




작가의 이전글 희고 검은 나비를 본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