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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윤영 Nov 04. 2020

고 박지선의 죽음이 나에게 유독 애통한 것은

다음 세상에 내가 니 딸로 태어나야지. 그래야 네가 내 맘을 알지.

나는 예술 중학교에 다녔다. 내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엄마의 바람대로 한국무용 전공으로 서울에 있는 모 예술 중학교에 입학했다. 나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리틀엔젤스라는 단체에 다녔다. 무용을 하고 노래를 하고. 지금은 길 가다가 물어도 아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내가 다닐 때만 해도 이 단체의 명성은 달이 기우는 것과 같이 쇠한 지 오래였다. 다만, 7-80년대 청춘을 보낸 세대가 암울하던 대한민국의 역사에 티브이를 켜면 오로지 밝고 예쁜 모습으로 낭랑하게, 또 담대하게 국내와 국외를 오가며 한국 무용과 노래를 하며 긍정적 한국의 모습을 알리는 어린이 홍보 대사 같은 이 단체를 동경하며 컸다고 들었다. 엄마는 초등학교 고학년 때, 부모를 여의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언니 밑에서 컸는데, 배우가 되고 싶었다고 했다. 엄마는 당시 동네에서 한창 유행하던 송창식의 "담배가게 아가씨"의 주인공이라 불릴 정도로 예쁘고, 동네 남학생들이 감히 데이트 신청을 못 하던 도도한 그런 여학생이었다. 엄마네 옆집 살던 또래 남학생이 담 너머로 자꾸 편지를 써서 비행기를 접어 날려 장독대에 안착시킴으로, 이모는 엄마 하교 전에 읽어보고 엄마에겐 건네주지 않았다 했다. 한 번은, 엄마가 이모가 엄마에게 온 편지를 보며 킥킥거리는 걸 봤는데, 얼마나 얄밉던지 했다. 예쁘고, 우아했던 엄마는 옆 지역 부산에서 배우 대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엄마는 큰 용기를 냈다. 친구의 옷을 빌려 입고 대회에 나가 1등을 거머쥐었다. 문제는 1등을 함으로써, 경상도 지역의 신문에 대문짝 하게 실렸다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신문 기사를 본 이모에게 엄마는 다음 날 무지하게 혼났다고 했다. 어디 가서 부모 없다는 소리 들을까 엄하게만 엄마를 키웠던 이모는 엄마가 학교 끝나고 떡볶이 사 먹는 여유도 주지 않았다. 단 10분이라도 하교시간이 늦으면 바로 학교에 전화하고, 선생님께 전화하고, 엄마는 공부만 했다. 공부를 꽤 잘했던 엄마는 서울의 명문대에 진학했고, 대구로 향하는 코오롱 버스를 탔다가 동향 사람인 아빠를 만났다.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 내가 딸인 것을 알고, 이 나라에서 딸들은 공부를 아무리 잘해봤자 하등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단다. 나를 예쁘게 키워서 보란 듯이 화려하게 사는 것을 보고 싶었단다. 나는 어릴 때 공부에 큰 뜻이 없었고, 엄마는 망설임 없이 나를 무용의 길로 이끌었다. 내가 예술 중학교에 들어가 공연을 위해 남산 국립극장 대극장에 섰을 때, 엄마는 어두운 관객석에서 그런 나를 보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고 했다. 엄마의 꿈을 이룬 것 같이. 우리 자식들은 엄마 몸속에서 정기를 조금씩 빨아먹고 세상으로 나와 엄마의 눈물을 조금씩 빨아먹으며 큰다. 나는 엄마의 꿈을 대신해서 이뤄준 나 자신이 대견스럽다가도 엄마도 안쓰럽고, 또 왠지 모르게 오빠는 느끼지 않아도 되는 그 보이지 않는 짐이 나에겐 지워졌구나 생각했다. 내 전후좌우에 엄마가 있었다. 음지와 양지, 내가 넘어지고 찬양받는 그 모든 순간에, 세상을 스펀지처럼 쭈욱 빨아들이고 쑤욱 내뿜는 그 모든 순간에, 뒷바라지란 명목으로 엄마는 늘 내 도처에 있었다. 내가 세상이 두려워 뒷걸음질 칠 때도, 온몸으로 쏟아지는 햇살에 너무 눈이 부셔 오금이 저려 걷지 못하겠을 때에도, 엄마는 늘 통화음 2번이면 "왜~"하고 답을 하는 것이다. 


 

예술 중학교에 들어가고 나는 왕따를 당했다. 잘하려는 욕심이 지나쳤던 것 같다. 모두에게 예쁨을 받고 싶어 개그 콘서트에 나오는 코너들을 달달 외우고 다녔다. 선배들이나 무용 선생님들이 자주 장기를 시켰기 때문인데, 나는 늘 준비되어 있었다. 노래는 당시 유행하던 보아노래로 틈틈이 성대모사하며 연습도 해두었었다. 나는 치열하게 살았다. 무용도 열심히 했지만,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학과 선생님들의 예쁨도 받고, 학급 친구들의 신임도 얻어 학급 반장도 몇 년을 내리 했다. 학교 대표로 발표할 일이 생기거나, 글을 기고할 일이 있으면 선생님들은 늘 상급생들을 제쳐두고 나를 찾았다. 내 인생의 황금기였다. 그러다 보니, 시기하는 친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랑 가장 친한 친구가 오랜 기간 동안 내 뒤에서 나를 이간질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일로 나는 공황장애가 왔고, 몸에는 스트레스로 피부염이 생기기 시작했다. 결국 무용을 그만뒀다. 정말 지옥 같은 시간들이었다. 학원도 가지 못했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가면 누군가 내 뒤통수를 지켜보며 옆 사람에게 내 욕을 할 것 같았다. 




이 피부염을 고치려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는 아토피라고 했다. 아토피는 신생아들이나 성인들에게 주로 발병되는데 중학생에게 발병된 것은 거의 본 적이 없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먹는 스테로이드와 바르는 스테로이드 연고를 줬다. 먹는 약 중에는 수면제 성분을 가진 약도 있었다. 가려워서 긁느라 잠을 못 잤기 때문인데, 고 박지선이 자면서 긁지 않으려고 운동화 끈으로 손을 묶고 잤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온몸이 진물로 뒤 덮여 이부자리를 이틀에 한번 갈고, 어떤 스킨, 로션도 피부에 닿는 순간 피부가 발작을 한다. 엑저마(Eczema)라는 면역과민반응이 한번 발현되면, 어떤 식이요법도, 제품도 소용이 없다. 다만 스테로이드만이 개선 효과가 있는데, 스테로이드를 장기 복용하게 되면 갑상선 기능이 약화돼 뭐를 하기만 해도 금방 지쳐 일상생활이 어려워지고, 그렇게 되면 성인인 경우 사회생활이 힘들다. "단지 피부병인데?" 할지 몰라도, 피부가 우리 몸에서 가장 큰 장기인 것을, 피부병을 겪어보지 않는, 약소한 여드름을 청소년기에 겪은 사람들은 절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십수 년을 아토피로 알고 증상이 악화될 때마다 스테로이드 처방으로 청소년기를 보내고 청년기에 접어들던 나는 20대 후반에 찾은 회사 앞 피부과에서 새로운 얘기를 들었다. "이거 지루성 피부염이에요, 아토피가 아니라." 이게 또 뭔 소린가. 요즘 피부과는 시술 위주로 운영되고, 돈이 안 되는 피부과 진료는 하지 않는 곳이 많다. 아토피이던 지루성이던 치료 방법이 없기 때문에 어느 병원을 가도 스테로이드성 연고나 약을 처방해 주는 것이 다다. 종합 병원도 마찬가지다. 좀 다른 게 있다면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얼굴에 난 여드름을 짜주는 정도다. 낫지 않는, 아무도 몰라주는, 운동을 하면 나오는 땀 때문에 따갑고 간지러워 운동도 못하는, 겉으로 보기에는 피부가 좀 건조하고 예민한 것 같은 사람들의 고통을 가족들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사춘기에, 몸에서 가장 연한 부분부터 발현되는 피부염이 얼마나 수치스러운가. 두피, 겨드랑이, 팔 안쪽 접히는 부위, 무릎 뒤 접히는 부위, 사타구니, 생식기 등 대체로 잘 보이지 않는 부위가 가장 심하게 발현이 된다. 머리도 많이 빠지고, 오랫동안 가만히 앉아있거나 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긁을 수도 없고, 화장실에 가서 몰래 긁을라치면, 긁고 나서 눈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각질들을 보고 있노라면 치욕스러운 것이다. 아무리 잘 씻어도, 씻고 또 씻어도 각질은 생겨나고 또 생겨난다. 안 씻어도 마찬가지다. 그 각질들이 쌓인다. 건조해서 생기는 각질이 아니기 때문에. 




나도 화장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흔한 선크림도 바르지 못한다. 이게 뭐 대수인가 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것을 나는 하지 못한다는 것이 한 인간에게 얼마나 큰 상실감과 우울을 가져다주는지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정상의 범위에서 조금이라도 비껴간 것이, 이 험난한 세상에서, 나는 제약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게 눈에 보이는 것이라는 게. 아름다움이 하나의 스펙처럼 여겨지는 이 세상에서 나는 영원히 노력해도 그 스펙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이. 차라리 다른 데가 아팠으면 싶을 정도로 피부가 좋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피부에 수천만 원을 들여도 여전히 소위 나쁜 피부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 팀원들과 같이 협력사와의 미팅을 준비하다가도 나는 한 번씩 화장실에 가서 미칠 것 같이 가려운 곳을 긁고 와야 한다는 것을. 미칠 것 같이 가려오는 것 때문에 죽어버리고 싶은 것을, 죽으면 이 가려움이 없어질 것인데 싶은 것을 꾹꾹 참고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누가 대단하게 볼 것인가. 자꾸 화장실에 가니, "저거 저거 집중을 못한다."라고 생각할 뿐이지. 




고 박지선의 죽음이 나에게 너무 애통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가 겪었다는 피부병에 대해 어느 기사 댓글에서 "그깟 피부병으로 죽나" 하는 것을 봤기 때문이다. 위가 아프고 간이 아프면 "그랬구나"하는데, 피부가 아프다면 "그까짓 거"한다. 우리 몸의 가장 큰 장기가 아픈 것인데, 그것도 눈에 보이게 아픈 것이고, 똑같이 사회생활이 힘들 만큼 고통스러운 것인데. 자아를 갉아먹고, 언제 나을지 모르는 막연함이 미래라는 희망을 갉아먹는. 인스타그램을 보면, 아름다운 피부에 몸매에, 뭇 남성들에게 사랑받는 여성들이 줄지어 피드에 올라오고, 마치 "이래야지 사랑받고 예쁨 받지. 넌 영원히 나처럼 행복할 수 없어" 하는 것만 같은 그 좌절감에 잠 못 이루는 밤들이 얼마나 많은지. 스테로이드 부작용은 다른 하나는 살이 찌는 것인데, 별 다르게 먹는 것이 없어도 갑상선 기능 약화로 살이 찐다. 다이어트를 해도, 안되고. 고 박지선이 트위터에 다이어트에 관한 글을 올린 것을 보며 가슴이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묵직하고 빠르게 지잉, 아파오는 것이다. 그가 엄마에 대해 올린 일련의 트윗들이 너무너무 가슴이 아픈 것이다. 나와 내 엄마를 보는 것 같아서. 내 엄마도 여전히 아름다운 60대고, 예쁜 피부인데, 나는 그렇지 않아서.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시커멓게 변해버린 온몸의 피부가 혹자는 태닝을 한 것이냐, 간이 안 좋은 것이냐, 피곤하냐 해도, 엄마는 알면서. 엄마는 내가 힘든 것을 알면서, 나에게 딱히 해준 것 없는 것 같은 것이. TV에 나오는 김태희를 보면서 "김태희 엄마는 딸이 저렇게 이쁘니 좋겠다" 하는 게 얼마나 원망스럽던지. 고 박지선 엄마가 TV를 보며 임시완의 예쁜 외모를 예찬하며, 저렇게 예쁘면 고민이 많겠지 하니, 고 박지선이 나를 좀 걱정해 달라고 한 것이. 나는 마냥 웃긴 트윗으로는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그의 많은 트윗들이 그의 얼굴, 몸매에 관한 것인데, 그의 가족과 그의 친한 지인들이 그에게 한 말들, 퉁명스럽게 툭툭 던진 짱돌 같은 말들이 그를 후둘긴 것이 분명한데도, "웃기지 않아요" 하며 그가 트위터에 올려놓은 것이. 나는 마냥 웃기지가 않았다. 그래서 예전에도 팔로우를 차마 못했는데, 그가 생각나 다시 찾은 그의 트위터의 트윗들을 보니 나는 이 사회가 모멸스러운 것이다. 자기들도 지들 얼굴에 대고 "못생겼다. 웃기다. 하하하" 계속 이 지랄을 떨면 분명 버럭 화를 낼 것인데, 그에겐 왜 마치 이 모든 것이 그의 운명이고 이를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이기라도 해야 하는 양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들을 해댔을까. 솔직이라는 것은 위선이지. 사르카즘(Sarcasm)처럼 우스운 것이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다 지껄여놓고 "에이 그거 다 농담이야. 그렇게 받아들이면 쓰나. 너만 속 좁게 되지" 하는 위선자들의 위트. 그의 피부병이 그를 괴롭게 할 때에도, "그까짓 거, 어때. 넌 여전히 예쁘고 아름답단다" 해주었으면, 그가 그렇게 다시는 아무도 자신을 볼 수 없는 곳으로 숨기지 않아도 되지 않았을까. 이것이 비약이라 하는 사람들은, 겪지 않아 봐 모르는 것이 확실하다. 




한편으로는, 왜 기가 죽나 내 눈에는 예쁘기만 한데 싶다가도, 왜 다른 집 딸처럼 좀 더 예쁘게 태어나지 않았나, 그럼 지도 편하고 나도 편했지 싶다가도, 이러면 저러면 뭐 어때, 내 딸 이대로 괜찮은데 싶다가도, 또 더 꾸미면 예쁠까, 아냐 안 꾸며도 내 딸은 매력 있어 싶다가도, 또 좀 더 예뻤다면 하는 엄마 마음. 피부병에 괴로워한 딸을 보며 미안하다가도, 병은 낫겠지 싶다가도, 뭐 그런 걸로 괴로워한 건가 좀 시원하게 떨쳐내질 못하나 싶다가도, 내가 대신 아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워 잠 못 이루는 엄마 마음. 나도 엄마와 매번 다투면서, 내 전후좌우, 음지와 양지, 통화음 두 번이면 "응, 왜" 하는 엄마를 알아서, 저 엄마도 내 엄마 같았을까, 가슴이 저미듯 아파서 이 새벽에 딸내미와 그의 엄마가 너무 안타까워, 눈 밭에 발자국 자박자박하듯이 꾹꾹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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