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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미소 Nov 19. 2020

똑똑한 여자에 대한 남자의 스티그마(stigma)

그리고 극도의 찌질함 

Now I see why people say smart women get to get laid for the first time later than anybody else. (사람들이 왜 똑똑한 여자들이 늦게 첫경험을 한다고 하는지 이제 알겠어.)


때는 바야흐로 2015년, 대학원에서 같이 수업을 듣던 독일인과 같이 프로젝트를 하며 친해졌다. 그는 종종 저녁에 술 한잔 하자고 나를 불러내곤 했다. 한국인 특유의 친절함으로 무장하고, 나는 그에게 홍대니, 신촌이니, 젊음이 있고, 유흥이 있는 곳에 안내자를 자처했다. 다른 학생들과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단 둘이 어울리기도 하면서, 서로 친구 이상의 감정이 생기는 것을 확인했을 즈음, 우리는 여느 커플처럼 데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독일어를 독학 중이었고, 그는 종종 사랑에 관한 독일어 시를 읽은 녹음 파일을 한밤중에 카카오톡으로 전송해주곤 했다. 나지막하게 간혹 장난스럽게 웃음기가 들어간 목소리가 난 좋았다. 실은 그는 당시 나에게 처음 데이트를 해본 남자였다. 외국에서 유학을 할때도 맹꽁이같이 도서관과 학교를 배회하고, 그게 학생의 본분인 줄 알았던 나는 정말 한인들이 자주 가는 노래방이나, 클럽, 파티 한번 가지를 않고, "내 주제에.." 하며 공부나 했다. 그리고, 데이트를 하고 커플이 되는 것은 남의 이야기였다. 나에겐 너무 생소하고, "그런 건 어떻게 하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고, 창피하고 쑥쓰러웠다. 그러던 내게, 한밤 중 다른 언어로 사랑을 고백하는 시를 낭송하는 이의 나즈막한 목소리를 듣는 것은 꽤나 생경하면서도 수채화의 물감이 종이 결대로 번지는 때와 같은 적적한 감동이 있었다. 


그는 왠지 모르게 서둘러댔다. 가끔 길을 걷다가도 이런 소리를 했다. 


You know, a German friend of mine, she has a Korean girlfriend. And one night, she invited my friend over, and when he got there, he saw his girlfriend lying down on the blanket in the middle of th living room. She was onto it. I heard if you have sex with your girlfriend or boyfriend here, you are bound to get married, right? I think she's trying to get my friend hooked. (내 친구 중에, 걔도 독일인인데, 한국인 여자친구가 있거든. 근데 하루는 저녁에 초대해서 여자애 집으로 갔더니, 거실에 요를 깔아놓고, 섹스할 준비를 해놓았더래. 부모님도 없고. 여기서는 섹스를 하면 결혼을 하는 것이 기정사실이라며? 그 여자애는 내 친구놈이랑 결혼하려고 안달인거 같아.)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싶어 벙찐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아니 섹스를 하면 결혼을 하는 것도 기정 사실은 아닌데다가, 어젯밤 나즈막하게 속삭이던 목소리로 이렇게 멍청한 소리를 해대는 것에 오만 정나미가 다 떨어지는 것이다. 또, 결혼을 "hooked"처럼 "낚이는", "묶이는"이란 뜻을 가진 단어로 표현하는 것도 그렇고, 이혼 가정에서 자랐다고 얘기할 때 다른 색안경을 끼고 보지는 않았는데, 이렇게 삐딱한 시선으로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이 당황스러웠다. 얘는 왜 이런 소리를 나에게 할까, 그 여자애가 설령 그렇게 했다고 한들 한국인 여성이라면 모두 그렇게 해야하는 것도 아닐 것인데. 그리고 나는 결혼은 차치하고, 너와 잠자리를 할 생각도 없는데. 그런 생각이 어떻게 드는지도 모르겠는데. 그는 이런 소리를 나에게 종종 예고 없이 하곤 했다. 




하루는, 독일 맥주를 파는 대학가 술집에 앉아 늘 그렇듯 몇 시간이고 양국의 정치 얘기를 하다가, 문득 그가 또 말한다. 


Do you not want to sleep with me? (왜 나랑 자고 싶어 하지 않아?)


그간 다른 한국 여성들의 예시가 이 질문으로 귀결이 됐다. 나의 심기를 살살 괴롭히면서 말 같지도 않은 외국인들 사이에서의 한국인에 대한 부정적 "카더라"와 선입견으로 나를 몰아세우더니 결국 이 소리네. 면도하고 오면 볼에 뽀뽀해 주겠다 하니 다음날 냉큼 말끔하게 면도하고 왔던, 차곡차곡 쌓아오던 귀여움 마일리지가 한 순간에 털리는 것 같은.. 나는 그를 안고, 키스하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하지만, 그와 잠자리를 하기엔 아직 나는 성겸험이 없었고, 그리고 조금 두려운 것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에게 확신이 좀 부족했다. 집으로 돌아가려고 지하철 역에 도착해 계단을 내려가려 돌아서는 나를 그가 붙잡았다. 키스해 달라고 했다. 나는 뭔가 조금 미안함, 죄책감을 안고 그에게 키스했다. 그리고 나서 그가 나에게 말했다. 


Now I see why people say smart women get to get laid for the first time later than anybody else. (사람들이 왜 똑똑한 여자들이 늦게 첫경험을 한다고 하는지 이제 알겠어.)


그 날 집에 돌아가서 씻고 침대에 누웠는데 그에게서 카톡이 하나 와 있는 것을 보았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에 열어보니, 그가 다른 어떤 동양 여성과 독일의 음식점에서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었다. 아무래도 친구 이상의 사이 같았다. 벙쪄서 그에게 답을 했다. 이게 무슨 사진이냐고. 그러자 그가 사진 속의 그 여성은 그의 독일인 여자친구란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Because you're not German, you're not better than her. (너는 독일인이 아니니까, 그녀보다 못해.) 


라며 웬, 나치(Nazi)같은 소리를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섹스를 거부당한 남자들은 이렇게 한 없이 초라해지고, 찌질의 극치로 가는 것인가.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그에게 그녀가 "니 놈이 여기서 다른 여자와 키스하고 돌아다니는 것"을 아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가 뻔뻔하게 "응, 알아."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그녀가 괜찮아한다고 말했다. 유럽에서는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을 뜻하는 "Erasmus"(에라스무스)를 종종 "Erosmus"(에로스무스) 라고 할만큼 많은 외국인들과 많은 성경험이 있을 것을 알고 있고, 연인관계에서 묵인한다는 것이다. 나는 대단히 문화 충격을 받고, 잘 밤에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아니, 그러면 그동안 니가 날 사랑한다며 보낸 낭송시는 다 뭔가 하니, 지도 일이 이렇게 될 것을 몰랐단다. 가볍게 즐기고만 싶었는데, 좋아하게 될 것을 몰랐단다. 




그렇게 나의 첫 연애(?) 경험은 드럽게 신고식을 마쳤다. 아름답고, 로맨틱하게 장식하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가 아름답게만 연애하기를 바라보며, 여기서 나의 그지같은 경험의 주절거림을 마친다. 끄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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