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집에서 가까운 혜성교회를 나그네처럼 드나들고 있다. 엄마 때문에 주일예배, 수요예배, 금요예배까지 가능한 한 빠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엄마는 “교회 가자” 한마디만 하면, 누워 있다가도 용수철처럼 일어나서 지금 당장 가자고 하셨다.
어릴 적 엄마는 외할아버지께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학교와 교회를 둘 다 다니면 집안 일손이 모자라니, 하나만 골라라.”는 말에 엄마는 주저 없이 교회를 선택했었다. 그곳에서 성경을 읽으며 한글을 익혔고, 양재와 요리 등 삶에 필요한 것들까지 배웠다고 했다. 우리는 농담처럼 말하곤 했다. 엄마는 아주 이른 시기에 ‘교회 대안학교’를 다닌 셈이라고 우기고 있다.
엄마는 동네 간판을 늘 잘 읽고 다니셨다. 한글이라서 그런가 보다 했는데, 어느 날은 저 멀리 보이는 ‘현대아파트’를 막힘없이 한자로 읽어내셨다. 또 어떤 때는 현수막에 적힌 한자들까지 거침없이 읽어 내려가시는 것을 보고, 나는 또 한 번 놀랐다. 동네 야학을 열심히 다니며 한자까지 배웠다고 했지만, 나는 그 사실을 어느새 잊고 있었다.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엄마의 모습은, 사실 아주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걸 그때 알았다.
엄마의 젊은 날 사진은 거의 대부분 교인들과 함께 찍은 것들이었다. 부모님은 오래전부터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온 목사님들의 이름을 자주 이야기하셨다. 반복해서 듣다 보니, 나 역시 마치 오래 알았던 분들처럼 그분들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기억 속에 자리 잡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자주 등장한 인물은 천대성 목사님이셨다. 부모님은 그 목사님을 따라 안동까지 이사를 갔고, 나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정작 나는 그곳에 6개월밖에 살지 않았지만, 그래서 내 출생지는 ‘안동’이다. 천목사님은 한때 부산 용호동의 나환자촌에서 목회를 하셨다. 그 시절, 부모님을 따라 그곳에 갔던 어렴풋한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작은 골목들과 특유의 공기, 어른들을 따라 조심스레 발을 옮기던 어린 나의 모습이 겹쳐졌다.
또 한 분, 서수일 목사님은 안성에 살고 계셨다. 어느 날 엄마와 함께 그곳을 찾아갔고, 사모님과 따뜻하게 인사를 나누던 순간이 아직도 선명하다. 엄마는 마치 오랜 가족을 만난 듯 반가워했고, 나는 그 모습을 곁에서 바라보며 부모님의 신앙이 어떤 사람들과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조금씩 알아갔다.
주일학교 교사로 시작해 나이가 들 때까지 성경공부를 가르쳤고, 정식 교육은 많지 않았지만, 성경 속에서 얻은 지혜로 평생을 살아냈다. 엄마에게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던 번뜩이는 통찰은, 아마 그런 배움에서 나온 것이리라. 나는 그 믿음이 결혼 후 생활고 속에서 조금씩 희석된 것 같아 늘 안타까웠다.
엄마는 젊은 시절 온 동네를 돌며 전도를 했다고 했다.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실 때마다, 꼭 기적 같았던 순간들을 함께 떠올리셨다. 비가 쏟아져 강물이 불어도, 엄마는 치마자락을 입에 물고 건넜다고 했다. 젖은 치마는 허벅지에 달라붙어 살갗이 시퍼렇게 변했고, 무릎까지 시린 채로 걸어야 했다. 그렇게 무리한 탓인지 어느 날은 손마디가 붓고 욱신거리는 관절염이 생겼다. 큰 병원에 가기로 해 둔 날, 엄마는 잠을 자다 꿈을 꾸었다고 했다. 꿈속에서 어떤 할아버지가 나타나 참기름 찌꺼기를 하얀 종지에 담아 놋수저의 등에 묻혀 엄마의 아픈 손가락 마디에 발라주었다고 했다. 그러자 시원하게 통증이 가라앉았고, 엄마는 놀란 마음에 잠에서 깼다. 꿈이 너무 생생해 엄마는 곧장 할머니께 말해 참기름이 조금 남은 병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꿈에서처럼 부어오른 부위에 발라 달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곳이 금세 가라앉고 말짱하게 나았다고 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외할아버지는 “큰 병이라도 난 줄 알았다”며 안도하시면서도, 엄마가 그렇게 좋아하는 교회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엄마가 다니던 교회를 따라가 보셨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엄마형제들에게도 엄마와 함께 교회에 가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지금 엄마는 오직 신앙 하나만 붙들고 살아가고 있다. 성경을 읽고 찬송을 부르는 순간에는, 그제야 엄마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찬송 가사를 여전히 많이 외우고, 성경 말씀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한 평생 쌓아온 신앙의 흔적들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그 신앙의 터전을 그대로 간직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오래 지켜드리고 싶은 마음에서 엄마와 함께 생활을 이어간다. 다른 기준으로는 엄마를 붙들고 있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엄마를 요양원에 모시는 선택은 어렵지 않다. 그러면 나도 내 삶을 다시 내 방식대로 꾸릴 수 있다.
엄마가 평생 지켜온 믿음의 자리, 그 연장선 위에 있는 이 시간을 책임지고 싶다. 엄마가 생전에 내게 준 사랑을 되돌려 드릴 방법이 거의 없기에, 이것 하나만이라도 지켜 드리는 것이 나의 최소한의 양심처럼 느껴진다. 처음에는 “오늘 수요일이니까 교회 갈까요?”라는 말만 해도, 시간이 한참 남았는데도 먼저 가자고 재촉하셨다. 금요 찬양예배는 저녁 8시에 시작하지만, 우린 일찍 가서 찬양팀의 리허설까지 구경했다. 아는 찬송이 나오면 엄마는 손뼉을 치며 따라 불렀다. 엄마가 찬송을 부르고 손뼉을 치면 엄마의 상태가 좀 좋아질까? 믿음보다 엄마의 치매상태가 나아지면 좋겠다는 욕심에 더 열심히 교회를 갔다. 8시 반쯤이면 엄마가 주무실 시간이 가까워서 우리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다. 그렇게 우리는 매주 찬양 공연만 잘 보고 오는 셈이었다. 기도회가 10시까지이니 끝까지 참석하는 것은 무리였다.
엄마는 예배 때 늘 앞자리에 앉고 싶어 하셨다. 앞에 앉아야지 은혜를 많이 받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엄마가 혹시라도 기침이 나거나 화장실이 급해질까 봐 나는 뒤편 자리를 선택하는데, 엄마는 금세 “앞으로, 앞으로” 하시며 걸음을 내디뎠다. 설득해도 잠시뿐이었다. 다시 앞으로 나아가려 해서 말리는 나, 앞으로 가면 안된다는 사실을 금방 잊어버리고 앞으로 가려는 엄마 사이에서 은혜를 받기도 전에 신경전으로 지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예배 중에 엄마가 조용히 계시는 순간이 오면, 그제야 긴장이 풀리면서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잠깐 눈을 감고 있으면, 엄마는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예배시간에 잠을 자면 어떡하냐?” 하고 핀잔을 주셨다.
“엄마, 나 그냥 눈만 감은 거예요. 기도하고 있다니까요…”그 말이 변명처럼 들릴까 부끄러우면서도, 정말로 눈을 감고 기도하는 시간도 있다. 물론 때로는 쿨쿨 단잠을 자기도 했다.
처음에는 엄마의 예배 참석이 치매를 더디게 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돌봄의 연장선에서 예배를 ‘방법’처럼 생각했던 그 욕심을 내려놓으려 한다. 지금 이 자리, 엄마가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한가.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떼를 쓰기도 했다. 엄마의 치매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를, 잊어버리는 일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기를. 그 기도 속에는 엄마를 돌보며 내가 했던 작은 잘못들에 대한 회개도 들어 있고, 앞으로 어떻게 더 잘 돌볼 수 있을지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마음도 함께 들어 있다. 예배 시간마다 생각하곤 한다. 엄마가 지나온 삶이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를 다시 기억하게 해드릴 수 있을까? 매일 감사 제목을 하나씩 찾아 드리기를 시작해 볼까?
어느 주일 아침, 엄마는 센터에 가야 한다며 일어나자마자 옷을 입고 나섰다.
“엄마, 오늘은 일요일이에요. 센터 가는 날 아니에요. 조금 있다가 식사하고 교회 가면 돼요.” 하지만 막무가내로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당시에는 아직 잠금장치를 해 두지 않았기 때문에, 나도 아침 7시부터 엄마를 따라다니며 진을 빼야 했다. 늘 가던 센터로 가셨다가, 다시 집을 거쳐 교회로 향하는 길을 오르셨다.
“엄마, 지금은 교회 문 닫았어요. 집에 갔다가 조금 있다가 가요.”
아무리 말려도, 엄마는 교회를 향해 올라가셨다. 억지로 막아서 올 수도 없고, 아침 내내 따라다니다 보니 진이 다 빠졌다. 그 순간, 엉덩이라도 펑펑 패 주고 마음이 굴뚝 같았다.
엄마는 늘 예배 시간보다 일찍 교회에 가시고,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 그리고 끝난 뒤 목사님과 교인들에게 인사를 나누는 일이 평생의 습관이었다. 여기 교회에서는 엄마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엄마에게는 모두가 늘 함께해온 교인들처럼 느껴지는 모양이다. 아이들을 보면 그냥 예뻐서 쓰다듬어 주고 싶어 하셨다. 그런 엄마를 옆에서 보며, 나는 엄마의 신앙이 지금도 엄마의 마지막 생을 지탱하고 있다는 사실을 날마다 새로 배운다. 엄마에게 신앙이 없었다면 이 시간을 어떻게 지내면서 살아갈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