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엄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때

by 김영연

오빠와 함께 경주로 봄나들이를 갔던 날이 있었다. 점심을 먹고 작은 찻집에 앉으니,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봄 햇살이 따뜻했다. 오빠는 잠깐 눈을 붙였고, 나는 따뜻한 공기 속에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말했다.

“집에 가야 한다. 오빠 깨워라.” 평소의 엄마라면 상상도 못 할 말이었다.

늘 “피곤하니까 좀 쉬어라, 더 재우라” 하던 사람이었다. 돌아가자고 서두르는 엄마의 표정엔 여유가 전혀 없었다.

“엄마, 여기 경치도 좋고… 천천히 쉬면서 차 한 잔 하니까 좋네요. 조금만 더 쉬다 가요.”

내가 달래 보았지만,

“차 마셨으면 됐지. 뭐 하러 더 있노?” 엄마는 막무가내였다. 그러더니 결국 직접 오빠를 흔들어 깨워버렸다. 오빠가 눈을 비비며 일어나자 엄마는 주변을 둘러보며 갑자기 말했다.

“우리랑 같이 온 사람 한 명 더 어디 갔노?”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엄마, 우리 셋이 왔잖아요. 다른 사람 없어요.” 그러나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분명 한 사람 더 있었는데…” 그 말과 함께 엄마는 찻집 안을 한 바퀴 돌며 그 ‘없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테이블 사이를 천천히 오가며, 마치 잃어버린 아이를 찾는 사람처럼 진지했고 간절했다.

엄마는 6·25 피난 시절, 옥주 이모를 한동안 잃어버렸다가 결국 엄마가 찾아냈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곤 했다.

아마 그때의 충격과 기억이 아직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는지, 그 흔적이 가끔 지금의 엄마에게서 나타났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다녀오면 엄마는 돌아오는 길에 꼭 말했다.

“우리만 왔나? 같이 온 사람 더 있었는데 어디 갔노?”

“그 어물한 게 혼자 가면 어떡하노? 가면 간다고 하고 가야지.”

“말도 안 하고 갔네. 잘 갔는지 빨리 전화 좀 해 봐라.” 엄마의 그 걱정 섞인 말투는, 어린 시절 피난길에서 느꼈을 그 불안과 두려움이 아직도 마음 어딘가에서 살아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내 안에서 또 한 번 뭔가가 무너져 내렸다. 그날 이후 나는 또렷하게 깨달았다.

‘엄마가 달라지고 있다’는 사실을.


혹시 엄마가 보고 있는 것이 우리와 같은 현실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환시를 겪는 루이소체형 치매일까— 나는 조심스럽게, 그러나 피할 수 없이 그 질문을 마음속에 던졌다.


엄마에게 가서 2-3일만 지내다 오려고 했는데, 하루, 이틀이 지나면 마음이 자꾸 늘어 일주일이 금세 흘러갔다. 엄마와 함께 목욕탕에 가는 일이 가장 큰 일이었다. 혼자 씻는 것조차 힘들어진 엄마, 데이케어센터의 목욕 서비스가 있다 해도, 다른 남자분들과 함께 씻는 곳은 싫다며 고집을 부렸다. 엄마집이 오래된 아파트라 목욕하기도 서글퍼서 엄마를 공중목욕탕으로 모시고 갔다. 등을 밀며, 마음도 함께 닦았다.

“저런 노인이 왜 공중목욕탕에 오나”라는 시선도 느껴졌지만, 그보다 엄마의 어깨가 작아 보여 눈물이 났다. 서울로 돌아오기 전에도 또 목욕탕을 찾았다. 주 2회 목욕을 한 셈이었다. 한 번이라도 더 모시고 가야 했다. 딸 유진이도 할머니와 목욕탕에 가려고 울산으로 갔다. 동네 목욕탕에서 때를 밀어주는 분이 친절했다고, 유진이는 할머니와 다녀온 일을 들려주었다. 딸이 스스로 나의 수고를 들어주고, 할머니에게 꼭 필요한 목욕을 챙겨 주는 모습을 보며, 그 마음과 손길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엄마의 목욕을 위해서라도, 나는 다시 엄마 곁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 마음이 무거웠다. 엄마를 혼자 두고 오는 길은 늘 아기를 집에 혼자 두고 나오는 기분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걸었다.

“엄마, 오늘 뭐 하셨어요?”

“이제 주무실 때 됐네요. 우리 찬송가 같이 부를까요?”

엄마와 찬송가를 부르며 하루를 마감했다. 엄마가 힘이 빠지면, 나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천천히 읊었다. 그 목소리를 따라 하시는 엄마의 낮은 음성은 기도처럼, 사랑처럼, 여전히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