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어기제 억제(Self-regulation) -
나를 찍어라
그럼 난,
네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주마
- 시인 이산하-
2006년 8월, 나의 둘째 아이가 정신과 치료를 받게 되었다. 아이는 해외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한국에 귀국하여 중학교를 입학하자마자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되어 심한 불안과 망상을 동반한 우울증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위의 시는 금쪽같은 내 아이에게 해를 끼친 가해자 아이들에게 복수할 생각만 하던 그 시기에 만났던 시(詩)다.
내 골수를 쪼개는 듯한 충격을 안겨준 이 시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밤길에서 백열등처럼 환하게 켜진 가로등을 만난 느낌이었다. 나는 높이 들었던 도끼날을 내려놓았다. 비로소 앞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詩)가 일러준 대로 나는 가해자 아이들에게 향기를 묻혀 주기로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렸다. 그것은 오직 향기를 품은 향나무만이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복수였기에, 나 자신이 먼저 향기를 품은 나무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가시나무 같았던 나에게는 그러한 변화를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실 그때는 가해자 아이들을 향해 복수의 도끼날을 내리칠 여유조차 없을 만큼 내 아이의 심리 상태는 심각하게 불안정했다. 오직 치료에만 전념해야 했고 가해자에 대한 복수는 어쩔 수 없이 유예해야 하는 시기였다. ‘부모로서 아이가 이 지경이 되도록 몰랐다는 말인가’라는 자책감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학교폭력 사건이 피해 학생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모든 피해 학생이 내 아이처럼 심각한 정신질환을 겪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 아이는 이렇게까지 심한 정신적인 병을 앓게 된 걸까?’라는 나의 물음은 거의 처절한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한 의사 선생님의 답변이 결국 나를 부모교육의 현장으로 이끌었다.
내 아이의 치료를 담당한 정신과 전문의는 발병 원인을 ‘취약성-스트레스-대응능력 모형(Vulnerability-Stress-Coping Competence Model)’이라는 이론을 토대로 설명해 주었다. 이 이론에 의하면 정신질환은 세 가지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발생한다. 정신질환에 취약한 뇌 구조를 가진 사람이(취약성), 환경적인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때(스트레스),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부족하면(대응능력) 질환이 발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서 의사 선생님은 아이의 상태를 나무에 비유하며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 열매가 너무 많이 달려 가지가 찢어진 상태’라고 표현하였다. 가지에 스트레스 열매를 달게 한 것은 여러 환경적 요인이었고, 찢어진 가지를 더욱 손상한 존재가 바로 가해 학생들의 학교폭력이었다고 했다.
같은 사건을 겪고도 사람마다 반응의 강도가 다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으며, 어떤 이는 스트레스를 견뎌내는 튼튼한 나무와 같고, 또 어떤 이는 가지와 줄기가 약해 몇 개의 열매만으로도 찢어지는 나무와 같다고 쉽게 설명해 주었다.
그렇다면 내 아이의 취약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던 점, 아이가 감당하기 힘든 스트레스 환경을 제공한 점, 그리고 스트레스에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지 못한 책임은 엄마인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밀려왔다. 담당 의사는 치료의 한 방법으로 엄마의 양육 태도와 환경적인 측면도 함께 살펴볼 것을 권유했다.
그 시기에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정신과 치료에 대한 편견이었다. 그로 인해 나는 오롯이 혼자서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고 고독한 나날을 보냈다. 누가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나처럼 이런 어려움을 겪은 부모가 또 있을까라는 고민을 끊임없이 했다. 그렇게 긴 고민 끝에 도움을 얻기 위해 찾아간 곳이 부모교육센터였다.
내 목표는 단 하나였다. 내 아이의 불안과 우울을 치유하고, 또래들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엄마가 되는 것.
‘우리 아이에게 맞는 양육 태도란 무엇일까?’ ‘건강한 부모 역할이란 어떤 것일까?’
그 질문들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 연구자로서의 ‘부모교육’이라는 길을 걷게 했다. 결국 그 사건은 내게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 되었고, 시가 일러준 대로 성숙한 방어기제를 통해 극복해낼 수 있었다.
심리학자 프로이트와 그의 딸 안나 프로이트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통해 인간의 자아가 고통스러운 감정이나 갈등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무의식적인 전략을 설명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에, 우리는 날마다 갈등, 좌절, 상처, 불안을 겪는다. 이 감정들을 그대로 마주하기엔 너무도 고통스러울 때, 자아는 무의식적으로 감정을 왜곡하거나 회피하여 정서적 균형을 유지하려 한다. 이것이 바로 방어기제이며, 정신적 붕괴를 막기 위한 자아의 생존 전략이다.
그런데 이 방어기제에도 ‘성숙도’가 있다. 미성숙한 방어기제가 있는가 하면, 성숙한 방어기제도 있다.대표적인 성 숙한 방어기제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승화: 분노와 공격성을 운동, 예술 등의 건설적인 방식으로 전환
유머: 스트레스를 웃음으로 승화
이타주의: 외로움이나 불안을 봉사활동으로 해소
이산하 시인의 「나무」는 억제와 승화를 담아낸 시이다. 우리 속담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역시 억제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즉각적인 분노의 표출이 아닌, 감정을 의식적으로 조절하고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방식으로 대응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감정 조절 능력, 즉 자기조절(Self-regulation)과도 깊이 맞닿아 있다.
여기서 억제와 억압은 다르다.억압은 미성숙한 방어기제로, 감정을 억눌러 숨기지만 결국 언젠가 폭발하게 된다. 반면 억제는 감정을 조절하고 관리할 수 있는 성숙한 방식이다.
이러한 성숙한 방어기제는 정서적 회복력을 키우고, 대인관계를 원만하게 만든다.
‘미운 사람에게 떡을 준다’는 건 공격성을 너그러움과 호의로 전환하는 승화의 전형적인 사례다. 감정에 휘둘려 싸우기보다, 따뜻하게 대함으로써 상대의 태도를 변화시키는 전략이다.
그때 나는 문득 깨달았다. 내가 가해자 아이들에게 분노하는 그 순간에도, 나 역시 아이에게 상처를 준 또 다른 가해자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 통찰 이후, 감정은 가라앉았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보다 이성적으로 고민할 수 있게 되었다. 결국 학폭위(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는 열지 않기로 결정했다.
긴장하던 가해 학생의 어머니를 먼저 만났고, 이후 학생들을 직접 불러 자초지종을 들어보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다. 해외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던 우리 아이는, 또래에 비해 순진(?)한 편이었다. 수업 시간 중 자리를 바꾸는 장난에 동참하지 않았고, 결국 그 장난이 선생님께 들켜 가해자 아이들이 야단맞은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괴롭힘이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였다.
학교폭력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어른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시각은 “재발 방지”여야 한다. 사춘기 시절의 이런 사건은 결코 일어나선 안 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피해를 최소화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그 학생들에게 우리 아이의 심리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설명했다.
“너희가 하고자 했던 장난이 우리 아이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 그리고 그 장난이 폭력으로 변한 순간 얼마나 큰 위협이 되었는지를” 차분히 이야기했다.
그리고 진심으로 우리 아이를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뜻밖에도 다섯 명 중 한 명의 아이가 진심 어린 ‘수호천사’가 되어 주었다.그 향기를 묻은 도끼의 힘은 놀라웠다. 그 아이는 반에서 영향력이 큰 아이였고, 덕분에 우리 아이는 무사히 중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으며 건강한 사춘기를 보낼 수 있었다.
상처는 때로 성장의 문이 된다 나는 그 일을 계기로 부모교육의 길로 들어섰다. 아이를 낫게 하려면, 부모가 먼저 달라져야 했다. 어떤 양육 태도가 우리 아이에게 맞는지, 바람직한 부모의 역할은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공부하고, 실천하며 강의하는 사람이 되었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그 시절의 고통은 내 삶의 전환점이었다. 그 사건이 없었다면 나는 ‘연구하는 부모’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이는 병을 앓았고,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제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날의 사건은 내 인생의 걸림돌이 아닌 디딤돌이었다고. 그리고 그것을 그렇게 만든 건, 나를 꿰뚫은 한 줄기 시와분노를 품은 도끼날에 향기를 묻혀준 나의 작은 용기였다.
누구나 인생에서 예기치 않은 고통을 맞이한다. 그 고통이 우리를 무너뜨릴 수도 있고, 성장하게 할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건, 그 고통을 어떻게 ‘다루느냐’이다. 복수와 분노 대신, 성숙한 감정 조절을 선택하는 것. 바 로 그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바람직한 교육 방법 이고, 가장 따뜻한 유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