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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Jul 25. 2023

골퍼와 캐디,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해 줄 신은 없다.

골프, 그 재미와 의미

골퍼와 캐디, 믿지 않는 사람을 구원해 줄 신은 없다.

 

 

(1) 로얄 세인트 조지에서 만난 특별한 이야기

 

로얄 세인트 조지 골프클럽을 세번째 방문했던 때에 있었던 일이다. 개인적 친분이 있는 캐디마스터 숀(Sean)에게 특별한 캐디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제이 스파이서(Jai Spicer)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젊지 않았고 힘이 없어 보였다. 나의 골프백은 직접 들고 다니는 백이기 때문에 무겁지 않지만, 그럼에도 걱정되었다. 그날은 비가 예보되었다.


제이는 왜 특별한 캐디일까? 디오픈이 개최되는 골프코스의 캐디는 플레이어의 캐디가 되기를 바란다. 로컬 캐디 중 최고 10명 정도만 꿈을 이룰 수 있다. 150명 내외가 참여하는 디오픈에서 로컬 캐디를 고용하는 선수는 전담 캐디가 없는 아마추어 선수와 재정적 어려움으로 캐디의 여행경비를 댈 수 없는 프로 선수다. 우승확률이 낮은 선수지만 로컬 캐디는 다크호스의 선전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

  

  

(2) 벤 커티스와 제이 스파이서


벤 커티스도 그런 선수 중 하나였다. 가까스로 참가 자격을 얻은 그는 로얄 세인트 조지에 와서 클럽 캐디를 배정받으려고 했다. 캐디마스터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해서 캐디 배정신청서를 식당 웨이트리스에게 맡겼다. 그녀는 일이 끝나고 캐디마스터 사무실로 갔지만, 역시 만나지 못했고 책상에 신청서를 올려 두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책상 위에 큰 물건을 올려놓는 바람에 신청서가 캐디마스터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이틀간 캐디마스터로부터 연락이 없자, 벤 커티스는 클럽 밖에서 캐디를 구했다. 로얄 세인트 조지 골프코스를 잘 아는 지역 캐디였으나 클럽 전속 캐디는 아니었다. 신청서가 제대로 전달되었다면, 벤 커티스에게 배정될 캐디는 제이 스파이서였다.

 

2003년 디오픈은 벤 커티스가 참여한 첫번째 메이저 대회였다. 메이저 대회에 처음으로 참여한 선수가 그 대회를 우승하는 일은 1913년 이후로는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벤 커티스가 디오픈에 참가했을 때, 그의 세계랭킹은 396위였다. 랭킹 제도가 도입된 이후에 그런 랭킹의 선수가 메이저 대회를 우승한 사례는 한 번도 없었다.


그는 타이거 우즈를 두 타차로 따돌리고 디오픈 챔피언이 되었다. 그의 우승에는 로컬 캐디의 뛰어난 조력이 있었다. 그러나 제이 스파이서는 자신이 도와줬다면 벤 커티스의 우승은 더 쉬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면 자신은 그 캐디보다 로얄 세인트 조지 골프코스를 더 잘 알기 때문이다. 누구도 모를 일이지만, 어쨌거나 행운은 제이 스파이서를 외면했다.


디오픈 우승 이후에 벤 커티스는 특별한 활약을 하지 못했지만, 2008년에 로얄 세인트 조지를 다시 찾았다. 로얄 버크데일에서 개최되는 디오픈을 준비하는 차원이었다. 이번에는 디오픈 챔피언으로 캐디마스터를 만났고, 캐디마스터는 제이 스파이서를 캐디로 배정해 주었다. 벤 커티스의 캐디가 되어 그를 도와준 일주일은 제이 스파이서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 벤 커티스는 말수가 적었고 신중했으며 캐디의 말을 잘 따랐다. 제이 스파이스는 2003년에 캐디마스터 오피스에서 일어났던 일을 벤 커티스에게 알려주었다. 벤 커티스는 빗나간 인연에 놀라워했다. 벤 커티스는 2008년 디오픈에서 어니 엘스와 함께 공동 7위로 리더보드 상단을 차지했고, 그 해에 미국 대표로 라이더컵에 출전하여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벤 커티스의 우승, 제이 스파이서와의 비껴간 인연과 다시 맺은 인연을 생각할 때마다, 골프는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것을 두고 ‘골프는 인생의 메타포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3) 제이 스파이서와 나

 

제이는 성실한 캐디였다. 비에 젖어 무거워진 골프백을 메고 뛰어가 타깃 방향을 알려주었고, 공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 미리 가서 기다리기도 했다. 그는 캐디와 포어캐디의 역할을 혼자서 수행했다.


그는 15번 홀을 지나자 나를 어느 정도 파악했다. 보기를 하고 아쉬워하는 나를 향해 어깨동무를 한 후에 이렇게 말했다. ‘너는 라이를 너무 많이 보는 경향이 있다. 너는 네가 퍼팅한 볼이 홀컵의 높은 쪽으로 흘러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 아니면 너는 무의식적으로 라이를 과대평가한다. 너는 발로 느끼는 라이를 과소평가하고, 눈으로 보는 라이를 과대평가한다.’ 그는 어렴풋하게만 느끼고 있던 나의 문제점을 정확히 지적했다. 나는 그의 예리함에 찔렸고, 그의 표현력에 감탄했다.


16번 홀은 골프 역사상 처음으로 티비 중계 중에 홀인원이 나온 곳이다. 1967년에 영국의 골프 우상인 토니 재클린의 이 홀에서 홀인원을 기록했다. 그 말을 듣고 욕심을 낸 나는 온그린에 성공했지만, 먼 퍼팅을 남겨두게 되었다. 퍼팅을 준비하면서 캐디의 지적을 생각했다. 버디퍼팅은 들어가지 않았지만 퍼팅이 나아졌다고 느꼈다. 17번 홀에서 180야드를 남겨 놓고 7번 아이언으로 공략하여 그린 에지에 가져다 놓았다. 공이 떨어진 위치를 본 제이는 이미 퍼팅을 생각하고 있었다. 홀컵 두 개 정도 왼쪽을 보라고 말했고, 더 보지 말라고 했다. 눈을 믿지 말고 발을 믿으라고 했다. 홀에 다가선 나는 라이가 홀컵 세 개가 넘는다고 생각했다. ‘너는 라이를 있는 것보다 더 보고, 본 것보다 더 많이 친다’라고 다시 지적해 주었다. 나는 그의 지시를 따랐고 볼은 홀컵에 빨려 들어갔다. 51피트(17야드) 정도 되는 거리였다.


그 후로 나의 퍼팅은 놀랍도록 좋아졌다. 교회대항전에서 롱퍼팅을 쏘옥쏘옥 집어넣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제이 스파이서 덕분이다.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다는 자만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디오픈에서 본 로리 맥길로이나 토미 플릿우드는 나의 퍼팅을 보고 배워야 한다.  그게 자존심 상한다면 그들은 제이 스파이서를 찾아가 보아야 한다.

   

  

(4) 캐디와 로리 맥길로이

 

초기의 캐디는 골프채를 들어주는 역할을 했지만, 지금의 캐디가 맡는 역할의 핵심은 클럽 선택과 코스공략에 대한 조언이다. 퍼팅라인을 함께 읽는 동반자이며 코치다. 플레이어의 멘탈이 흔들릴 때, 그것을 잡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캐디는 골퍼 이외의 골프의 전부다. 골퍼가 자신감을 잃었을 때, 골퍼가 의지할 수 있는 전부다. 그는 단순히 가방을 메는 것이 아니다. 캐디의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는 플레이어는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할 것이며,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등수 안에 들지 못할 것이다.


로리 맥길로이는 훌륭한 드라이버와 훌륭한 아이언 스윙을 가지고 있다. 롱게임에 강한 선수 중에 숏게임에 약한 선수가 있는데, 로리 맥길로이는 숏게임도 훌륭하다. 그의 문제는 오로지 퍼팅이다. 그는 퍼팅라인을 읽기 위해 이쪽저쪽 돌아다니지만 실제로 퍼팅라인을 잘 읽지 못한다. 루틴으로 왔다 갔다 할 뿐이다. 맥길로이의 진짜 문제는 캐디가 퍼팅라인을 보는 데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데에 있다. 다른 선수들은 캐디가 맞은편에서 라이를 보고, 선수 등뒤에서 라이를 보고, 퍼팅 목표지점을 손으로 가리키기도 한다. 퍼팅그린에서 맥길로이는 늘 혼자다. 조언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캐디보다 퍼팅라인을 잘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캐디는 오랜 친구다. 그가 친구를 캐디로 쓰는 것은 편하고 의지가 되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캐디는 페어웨이나 러프에서 클럽선택이나 코스공략에 별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것은 괜찮다. 맥길로이가 어떤 선수보다 롱게임을 잘하기 때문이다. 그이 캐디는 퍼팅그린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존재가 된다. 맥길로이는 짧은 퍼팅을 수시로 놓친다.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있었던 150회 디오픈에서 맥길로이는 마지막 날 챔피언 조에서 짧은 퍼팅을 여러 번 놓쳤다. 151회 디오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퍼팅에 이르는 셋업은 훌륭하다. 퍼팅을 실행하는 능력면에서 그가 부족하지 않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는 그저 퍼팅라인을 잘 못 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캐디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한다. 그것이 문제다. 그가 퍼팅라인에서 캐디의 도움을 받았다면 그는 150회 디오픈도 우승했고, 151회도 우승에 도전할 수 있었다. 그는 타이거 우즈에 육박하는 기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현실의 그는 타이거 우즈에 한참 못 미치며, 캐디의 조언을 불필요하게 느끼는 이상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5) 브라이언 하먼과 스콧 트웨이

 

151회 디오픈은 브라이언 하먼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다. 170cm가 안 되는 키의 하먼은 드라이버 평균 비거리가 280야드 정도 수준이다. 2019년의 타이거 우즈조차 자신의 드라이버 비거리가 우승 경쟁을 하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먼의 비거리는 턱없이 짧다. 그러나 그는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왔다. 비결은 퍼팅에 있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59번의 3m 이내 거리에서 58번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단 한 번의 3 퍼팅도 없었다. 맥길로이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기록이다.


그의 캐디는 스콧 트웨이인데, 그와 10년 넘게 호흡을 맞추고 있다. 스콧 트웨이가 브라이언 하먼에게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아직 충분히 기사화되지 않았다. 그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스콧 트웨이의 형 밥 트웨이는 1986년 PGA챔피언쉽에서 우승한 선수다. 밥 트웨이는 마지막 홀에서 벙커샷을 홀컵에 집어넣고 우승했는데, 이는 메이저 대회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우승이다. 그의 기적 같은 벙커샷의 희생양은 공공이 적이 되어버린 그렉 노먼이다. Bob Tway를 유튜브에서 치면, 그의 벙커샷을 볼 수 있다. 그는 벙커샷을 하기 전에 여러 차례 핀을 보았다가 공을 보았다가를 반복하는데, 이 모습이 어디에선가 많이 본 모습이다. 브라이언 하먼이 샷을 하기 전에 하는 동작이다. 너무 지루하고 이쁘지 않은 모습이지만, 하먼은 그 루틴을 티샷에서도 아이언샷에서도 벙커샷에서도 반복한다. 이 루틴은 밥 트웨이의 벙커샷과 똑같다. 하먼은 모든 샷을 밥 트웨이의 벙커샷과 같이 하고 있으며, 이 장면에서 스콧 트웨이가 브라이언 하먼에게 미친 영향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트웨이는 하먼에게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6) 김주형과 그의 캐디

 

영국의 스카이 스포츠는 골프 중계를 잘하지만, 한 가지가 나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동양인 선수를 잘 카메라에 담지 않는다. 우승 경쟁을 하거나 슈퍼샷을 날리지 않는 이상 카메라에 비추지 않는다.


그래도 카메라에 잡히는 선수는 콜린 모리가와, 히데끼 마쑤야마와 김주형 정도다. 콜린 모리가와는 미국 선수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디오픈 챔피언이다. 마쑤야마도 마스터스 챔피언이다. 그 둘에 비하면 김주형은 아직까지는 무게감이 떨어진다. 그래도 영국인 해설자는 김주형을 좋아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들이 김주형을 칭찬하는 이유는 김주형이 보여주는 캐디와의 호흡 때문이다. 그는 항상 캐디와 이야기를 나누며, 캐디의 조언을 구하고, 캐디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런 모습이 나올 때마다 해설자는 보기에 좋다는 칭찬을 반복한다. 실제로 보기에 너무 좋다.

   

  

(7) 캐디와 골프

 

영국에서 골프는 대게 캐디가 없다. 혼자 하는 골프다. 간혹 캐디와 함께하는 골프를 치는데, 그때의 골프는 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그때의 골프는 다른 종목의 게임이 된다. 캐디는 친구처럼 느껴지고, 때로는 구원자처럼 느껴진다. 한국에서 골프는 캐디가 있다. 캐디는 나만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 전원을 도와준다. 나의 친구인 캐디는 나와 나의 경쟁자를 똑같이 구원한다. 그러한 게임은 또 다른 게임이다. 그런 게임에서 승부는 캐디를 얼마나 신뢰하는가에 달려 있다. 믿지 않는 자를 구원해 줄 수 있는 신은 어디에도 없듯이 캐디도 마찬가지다. 믿지 않는 골퍼를 구원해 줄 골프의 신은 어디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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