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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우리 Aug 12. 2023

우리 일이 꽤나 외로운 일이군!

골프 그 재미와 의미

“우리 일이 꽤나 외로운 일이군!”

  

  

조금 일찍 현장에 도착하니 전인지 선수가 막 경기를 끝냈다. 레코더 하우스(스코어카드를 제출하는 곳)를 지나는데, 몇 명의 한국인이 전인지 사인을 받기 위해 서 있었다. 전인지는 이미 사인을 해주고 멀찍이서 팬클럽 멤버와 사진을 찍으며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전인지를 큰 소리로 불렀다. ‘전인지 선수! 여기 사인을 원하는 팬들이 있어요.’ 그러자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어제 15번 홀에서 전인지 화이팅이라고 크게 외친 사람이 저예요.’ ‘맞아요. 너무 크게 말하셔서 놀랐어요.’ ‘두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해 줘서 고마웠어요. 제가 응원하니 바로 버디를 하던데요.’ ‘응원 너무 감사해요.’


사인을 받지 못하고 서 있던 사람을 도와줬다는 생각에 자원봉사자로서의 역할을 이미 해버린 듯했다. 자원봉사자 헤드쿼터에 가서 등록한 후에 업무를 배정받고 샌드위치를 먹었다. 비가 부슬부슬 오기 시작했고 골프코스가 갑작스레 스산해졌다. 나의 업무는 스코어 보드를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 조에는 미국 선수 Tardy, 독일선수 Schmidt와 한국선수 이미향이 있었다. 마지막 조였다.


비가 한차례 온 이후인 3시 28분에 우리 조가 출발할 때, 그들은 +4, +8, +5의 성적이었다. 이미향 선수가 컷 통과를 위해서는 3언더파 정도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관람객은 거의 없었다. 아주 작은 대회의 무명 선수라도 이런 경우는 드물다. 가족이나 친구가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2번 홀에 갔을 때 멀리서 우산을 들고 서성이는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딱히 우리 조를 따라다니는 것 같지도 않고 할일없이 배회하는 것처럼 보였다.


경기는 지루하게 흘렀다. 버디나 보기 없이 초반이 진행되었다. 덕분에 나는 점수판을 바꾸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됐다. 경기가 중반에 접어들자 미국 선수와 독일 선수가 더블 보기와 트리플 보기를 쏟아 내기 시작했고, 경기는 더 느슨해졌다. 이미향 선수는 집중력을 잃지 않고 차분한 경기를 이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골프코스는 더욱 고즈넉해졌다. 주요 선수들의 플레이가 끝나면서 멀리에서조차 함성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넓은 36홀 코스에 몇 명만 남아 있었다. Tardy 선수가 친 공이 히스 속으로 들어갔는데, 공을 결국 찾지 못했다. 관람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공을 찾는 것이 훨씬 수월했을 것이다.



그가 다시 눈에 띈 것은 14번 홀에서였다. 관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14번 홀까지 눈에 띄지 않은 것은 아주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는 계속 있는 듯 없는듯한 모양이었다. 같이 이동하는 워킹 스코어러(페어웨이 안착여부, 티샷 거리, 퍼팅수, 벙커 세이브 여부 등을 현장에서 기록하는 사람)인 캐롤라인이 ‘저분이 이미향의 아버지일 것이다’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답했다. ‘이미향은 한국 선수인데, 저분은 일본인처럼 보인다. 이미향의 아버지라고 보기에는 나이가 들어 보인다.’


그의 옷은 한국인 골퍼의 옷이 아니었고, 그의 배회하는 형태가 일본인 같았다. 수염조차 그랬다. 무엇보다 달관한 듯한 몸짓이 컷통과를 위해 분투하는 선수의 아버지로는 보이지 않았다. 다가가서 물었다. 그는 늦게 미향이를 낳았다고 말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미향이는 효주, (지)은희와 함께 같은 숙소를 쓰고, 아버지는 혼자 골프코스로부터 멀지 않은 호텔에 있다고 했다. 비싸지만 한국의 모텔만도 못한 험블한 곳이라고 했다. 영국의 시골호텔이 대게 그렇다. 이미향 선수에 대한 이야기, 골프 선수의 부모의 삶에 대한 이야기, 컷을 통과하지 못하면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골프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야기에 빠진 나는 경기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다. 선수의 성적을 알지 못해 캐롤라인에게 점수를 물어보아야 할 판이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이미향의 점수뿐 아니라 다른 동반자의 플레이를 다 보고 있었다. 우리는 이야기를 위해 선수들과 꽤나 떨어져 있었지만, 그는 보지 않는 듯하며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16번 홀에서 이미향은 드라이버로 297야드를 보냈고, 투온에 성공하여 이글 퍼팅을 남겨두었다. 그녀는 전날 이 홀에서 이글을 했었다.


이미향의 이글퍼팅은 홀컵을 살짝 돌아 나왔다. 그래도 첫 버디였다. 좀처럼 버디 기회가 없는 하루였고, 힘든 라운드였다. 동반자와 관객과 날씨가 모두 이미향의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끝까지 씩씩했고, 자신의 루틴을 잃지 않으려고 분투했다. 18번 홀 페어웨이 중간에서 나는 이미향의 아버지와 헤어졌다.


어둠 속에서 18번 홀 그린으로 다가가는데 캐럴라인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우리 일이 꽤나 외로운 일이군!‘ 그랬다. 이것은 lonely business였다. 우리의 말을 듣기라고 한 것인지 18번 홀 스탠드에 앉아 있던 자원봉사자 두 명이 어둠 속에 들어오는 세 명의 선수와 세 명의 캐디에게, 그리고 두 명의 자원봉사자와 한 명의 레프리에게 큰 박수를 보내 주었다.


어쩌면 골프란 외로움을 본질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차장까지는 걸어서 꽤 멀지만, 동네를 잘 아는 나는 지름길을 알고 있었다. 숲 속의 길은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이제와 이 나이에 어둠이라고 무서울 것이 있겠냐마는 어둠은 무서움은 아닐지 몰라도 외로움은 확실히 배가시키고 있었다.

  

  

(동영상 뒷배경에 유유히 지나가는 한 남성을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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