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남편과 영화를 보러 갔다. 전날이 내 생일이었고 당일은 결혼 40주년이었는데 내가 택한 이벤트는 저녁 먹고 영화 보기였다.사실 생일치레는 이미 앞 주말에 했다. 아이들이 커서 집을 떠난 후부터 가족행사를 지내는 방식이 그 앞 주말에 모이는 것으로 자리를 잡은것이다.
나가서 저녁 먹고 영화 보러 가려고 했는데 계획을 바꾸어 집에서 먹었다. 요즘 들어 위장이 불편할 때가 많은데 집밥은 비교적 편안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내가 골랐다. ‘남은 인생 10년’이었다.평일저녁이어서 그런지 영화관은 아주 썰렁했다. 상영시간이 되어 입장을 했을 때 관객이 남편과 나밖에 없었다.
“영화 우리 둘이서만 보는 거 아냐?”
“그러게요. 영화표 두 장 값에 한 관을 통째로 차지하다니...”
그런데 잠시 뒤 다른 관객이 한 명 들어왔다. 혼자서 커다란 팝콘과 음료를 손에 들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나도 팝콘을 사고 싶었지만 남편도 나도 속이 편치 않아서 사지 않았었다. 팝콘 없이 영화관에 앉아 있다니 영화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재미가 없었다.
그리고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소녀 둘이 들어왔다. 우리는 맨 뒷좌석을 선택했고, 팝콘 청년은 가운데쯤 앉았고, 소녀들의 좌석은 앞쪽이었다.
의자는 푹신하고 몸을 편안하게 잘 받쳐주었다. 그래서 그런지 처음부터 졸렸다. 영화 보러 와서 잠드는 사람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했었는데 자리에 앉자마자 졸리더니 눈을 뜨고 있기가 어려웠다. 남편이 물었다.
“잘 거야?”
“아뇨. 안 자요.”
말은 아니라고 했는데 아닌 게 아니었다.
젊은 여주인공 마츠리는 불치병으로 남은 인생이 십 년이라고 했다. 영화 시작에 마츠리는 병원에 입원을 해 있었는데 옆 침대에 있었던 이는 죽었고 마츠리는 퇴원을 했다. 집에 와서 동창회도 나가고 친구들을 만났다. 그리고 거기서 남자 동창생 카츠토를 만난다. 카츠토는 소심하고 우울한 청년이었다.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다.
얼마를 자다가 깨어보니 마츠리와 카츠토가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스토리가 그렇게 흘러갈 줄 알았다. 마츠리의 길지 않은 여명이 카즈토와 연애를 하면서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또 졸다가 깨어보니 아직도 큰 진전 없이, 그렇다고 큰 문제도 없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미츠리가 카츠토와의 관계를 진전시킬 수 없는 것은 그녀의 불치병 때문이다. 미츠리를 안타까워하는 가족들의 이야기, 그리고 특별히 티 내지 않고 조심하는 친구들, 그리고 우울했던 카츠토의 삶에 의미가 되는 마츠리.졸면서 띄엄띄엄 보았어도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일본 영화는 드라마틱한 사건이 없이 저렇게 잔잔하구나.’
전에도 집에서 넷플릭스에서 추천된 일본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느린 전개가 지루해서 보다가 말았었다.상황이나 심리 묘사는담백하고 세심한 편이었다.
그래도 이제 영화가 종반에 접어들었는지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 마츠리의 머리가 단발이 되었고 장소가 다시 병원으로 바뀌었다. 의료기구들에 둘러싸여 있는 마츠리, 앞 장면에서 잠깐 졸다가 깨어서 보았을 때 마츠리가 엄마에게 더 살고 싶다고 하며 울다가 오열하던 모습이 있었고, 병원에 다시 입원한 마츠리는 캠코더의 영상을 보며 조용히 자신의 삶을 반추하고 있다. 그녀는 작은 캠코더를 가지고 다니며 자기의 시간을 기록해 두었던 것이다.카츠토와 함께 지낸 시간들이었다.
그리고 카츠토는 한 작은 가게에서 일을 배워 드디어 자기만의 가게를 가지게 되었다. 첫날의 일과를 마치고 마츠리를 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에 정신없이 달려간다. 그 시간에 마츠리는 위기를 맞았고 의사가 전기 충격으로 그녀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려고 했지만 마츠리는 반응이 없었다.
마츠리의 생명이 꺼지는 장면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앞줄의 소녀들이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사실 그때 나도 눈물이 났다. 죽기 전에 캠코더로 직접 기록한 카츠토와의 추억을 깊은 망설임 속에 삭제하는 마츠리, 결국 카츠토를 만난 초기의 영상까지 왔는데삭제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있다. 그때 마츠리에게 남은 시간이 다 했다. 삐-하고 울리는 의료기기의 기계음, 의료진의 급한 발걸음과 다급한 조치, 카츠토에게 사랑받았기에 자기의 인생은 괜찮았다는 마츠리의 독백, 영화에서 마츠리의 마지막 장면은 과장 없이 담담했다. 카즈토가 막 병실에 도착했을 때 심폐소생술도 소용없었던 마츠리가 거짓말처럼 눈을 뜨고 힘없이 카즈토의 손에 기척을 한다. 마츠리는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전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아까 그 팝콘 청년을 만났다. 주차료 할인을 받기 위해 입장권을 스캔하는데 그 청년이 잘 안 된다면서 우리에게 먼저 하라고 했다. 해보니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어찌어찌 간신히 처리하고 나서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게 되어 내가 물어보았다.
“영화는 잘 보았어요?”
“네. 제가 일본 영화를 좋아해서보러 왔어요. ”
이야기를 나누어 보기 전에는 혼자서 그렇게 커다란 팝콘을 샀다는 것에 놀랐고 주차 티켓 스캔을 하러 서 있을 때는 종아리에 문신이 있어 나도 모르게 경계심이 들었는데 막상 인사를 나누고 보니 상냥하고 예의 바른 청년이었다. 그 청년이 어떠한 사람이건 사실 나와는 상관없을 일이기는 했으나 젊은이가 매너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 왠지 모를 안도감을 주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남은 인생이 있기 마련이다. 나의 남은 인생은 얼마일까? 언젠가 친구들 모임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는 다들 이삼년 전에회갑을 지낸 터였는데 인생 팔십이면 족하다는 친구와 그건 너무 짧다는 의견들이 오갔다. 그리고 한 친구가 말했다.
“나는 그런 가늠을 도저히 못 하겠어. 남은 수명을 깎자니 너무 아까워서 결정할 수가 없어.”
우리는 그 친구의 ‘너무 아까워서’에 다 같이 웃었다.
남편과 나는 결혼 사십 주년을 맞았고, 나는 머리칼이 하얗게 세었다. 마츠리가 죽기 전에 혼수상태에서 카즈토와의 일생을 꿈꾸는 장면이 있었다. 둘이 결혼식장에 서 있는 장면, 아이가 태어나는 장면, 그 아이가 자라는 장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는 마츠리가 꿈꾸었던 그 과정을 현실에서 다 거쳤다. 장면 장면마다 어려움도 있었을 텐데 그 기억은 이미 사라졌다. 현재는 현재의 어려움이 있지만 이것도 시간이 흐른 다음에는 잊혀진 기억이 될 것이다. 반면에지나간 아름다움은 점점 더 영롱해진다. 그래서 삶의 마지막에 최종적으로 남은 기억은 분명 아름다운 기억이 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