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판을 달리던 소년 _H시인에게
- 아르코 문학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오늘에야 알았지 네가 죽었다는 걸
네가 살았다는 것도 모르고
나는 잘 살았는데
껍데기 둥둥 국물만 떠먹으며 이게 뭐야 했는데
밑바닥에서 네가 그렇게 우려지고 있었다니
끝내 졸여지고 타버릴 때까지
나는 너를 보지 않았다
재로 남은 네 말들이
이제야 후두둑 떨어진다
입과 피아노와 고무인형과 쥐와
또 누나들의 치마와
어리고 불퉁한
네가 걸었을 밤이
이제야 눈 가린 채 도착했다
네가 보았던 것들이 소포로 묶여 이제야 내 앞에 풀어졌다
요 지저분한 것들
요 더럽고 이쁜 것들
고무인형 눈을 이제는 보지 않아도 되지
기침을 하면서 너를 생각한다
옆집에서 같은 땅을 밟고 걸어 다니고 있었구나
토끼 눈은 왜 붉냐고 묻던 소년과
숲에서 흰 뱀을 보았던 소녀는
손을 흔들지도 않고 헤어졌지
네가 걸었던 길이
사방에서 내게로 들어온다
걷지 않아도 길은 혼자 걸어들어와
안방처럼 자리를 잡고 앉네
어려지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수 없었던
너를 이제야 바라본다
안녕, 오랜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