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솔직담백한 에세이
[건강하게 사회의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방식]
1. 사회에서 디자이너로서 첫 걸음
2. 디자이너의 포지션과 역할 그리고 특성
3. 디자이너가 건강하게 성장하고 인정받기 위해서
4. 디자이너와 작가의 접점, 표현 욕구에 대해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사회에 나와 2년 정도의 디자이너의 삶을 살고 퇴사 후 다음 단계를 준비하며 휴식기를 보냈다. 현재는 디자이너의 커리어를 어떤 분야에서 어떤 방식으로 쌓아 갈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스타트업에서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어쩌면 지속될지도 모르는 디자이너의 성장과 고민들에 대해 한번 풀어보고 누군가와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디자이너 에세이를 시작해 본다. 내가 1년 차 디자이너일 때에 느꼈던 것들부터 차근차근 풀어보고자 한다.
지난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학교를 졸업하고, 어딘가에 속해 있지 않은 채 무언가를 준비하는 그 과정이 나에게는 끔찍하고 무서운 시기였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취준의 무게와 다르지는 않았지만, 사회에서 인정받는 디자이너와 나만의 디자인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뒤섞여 혼란스러운 욕구 속에 살던 시기였다. 졸업 후 얼마 안 되어 지인의 소개로 졸업 후의 첫 사회생활을 가구 브랜드의 매니저로 시작했다. 간결한 프레임으로 이루어진 자작나무 맞춤가구를 디자인하고 판매하는 샵이었다. 디자인 감각이 있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곳이었고 손님 즉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던 나는 어렵지 않게 매니저로서 역할을 했다. 가구와 소품을 다루는 샵이며, 일종의 간결한 취향과 라이프 스타일을 다루는 물건과 가치관을 보여주는 샵이기도 했다.
이곳에 근무하면서 손님을 응대하는 서비스 능력, 물건들을 잘 디스플레이하는 능력을 발견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디자이너에게 가장 중요하다고도 볼 수 있는 소통능력과 더불어 공간 안에서 배치되는 물건에 대한 시각적 안정감을 보는 감각을 키울 수 있었다. 디자인과 대학시절 내내, 밤이고 낮이고 아이디어 회의와 그래픽 작업에만 적응되었던 나에게 특정 공간을 소개하는 일은 꽤 매력적인 경험이었다. 정갈하게 정돈된 제품을 소개하는 쇼룸에서 사람들을 대하며 물건을 소개하는 일은 너무나도 고요하고 차분한 업무였다. 잘 브랜딩 된 가구 브랜드가 소비자에게 주는 영향력을 몸소 느끼며 그 브랜드의 소속감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었다.
매니저뿐 아니라 필요할 때엔 디자이너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며 브랜드 안에서 1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건축가, 디자이너, 작가, 화가 등의 사람들을 손님으로 만나기도 하며 다양한 관계를 맺고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에 ‘나는 치열하게 디자인을 해야 하는데’라는 조바심을 가지며 지냈다. 대학 시절 동안 적응되었던 작업 습관 덕에 시간이 날 때마다 그래픽 작업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래픽 작업을 쉼 없이 만들어 내는 선후배와 동기들을 보며 조급함을 느끼면서도 브랜드에 소속되어 있었다. 익숙하고 편안했지만, 결국 2년을 채우기 전에, '디자인 회사’에서 ‘디자이너’가 되자는 결정을 내렸고 브랜딩 에이전시로 이직을 하게 되었다. 한 브랜드의 결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매니저와 인하우스 디자이너의 역할에서, 브랜딩 에이전시의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얼마나 치열한 역할인지 깨닫지 못한 채.
브랜딩 에이전시는 말 그대로 신생 브랜드의 이름을 짓거나 브랜드의 디자인을 리뉴얼하거나 부가적인 디자인을 하는 곳이다. 새로운 것을 기획하고 디자인의 무드를 정하고 이름을 짓고 그래픽을 만들어 내는, 다양한 형태로 디자이너로서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단, 디렉터의 영향력이 작업 방향에서 지배적이었고, 클라이언트라는 크나큰 계약관계 상의 갑이 존재하는 곳이었다. 대학교에서 직접 기획하고 아이디어를 조율해 나아갔던 프로젝트와 달리, 에이전시에서는 철저하게 사회 안에서의 디자이너로 기능해야 했다. 트렌드를 읽고 그에 맞는 수준의 세련된 아웃풋을 내야 하며, 클라이언트가 원하는 것을 캐치하고 시각적으로 표현해 내야 하는 의무감과 능력이 필수적인 곳이었다. 브랜드를 만들고 디자인을 하는 에이전시의 특징이기도 하고, 사회 안에서 월급을 받는 직장인으로서의 디자이너의 역할이기도 하다. 신입 디자이너로 나는 다양한 가능성과 제한성, 그리고 책임감 사이에서 성장하기도 했고 좌절하기도 하며 1년을 보냈다.
가구 샵의 매니저에 이어 브랜드 에이전시 디자이너를 거친 후 다음 스타트업에 들어온 현재, 그중에서도 나의 에이전시 경험의 궤적들을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불만을 토로한 부분도 없지 않지만,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정리해 보려 했다. 내 역량과 업무 스타일의 격차에서 오는 주관적 사항도 있음을 미리 밝힌다.
일 년 간 근무한 브랜딩 에이전시는 어땠나.
-동료와의 경쟁을 통한 시안 획득 기회.
-클라이언트의 즉각적 디자인 수정에 대한 업무처리 능력 필요.
-주도적으로 시안을 내고 어필해야 하는 적극성 필요.
-클라이언트의 피드백에서 받는 방향 전환이 잦은 디자인 작업.
-회사에서 요구하는 시각적 스타일과 완성도를 따라가지 못할 때의 업무적 지체와 성과 저조.
-사전 기획과 별개로 벤치마킹으로 비주얼 아웃풋이 날 수도 있는 업무 방식.
-데드라인에 맞춰야 하는 업무 강도와 완성도(다른 이유들보다 가장 스스로 괴로운 부분)
맞지 않았던 부분과 발전시켜야 할 부분들.
-자율적으로 한 회사의 네이밍과 디자인을 끌어 가기에는 부족했던 나의 역량.
-클라이언트에 의해 빠르게 전환되는 디자인 방향성에 대한 조율의 어려움.
-회사에서 원하는 시각적 무드와 차이가 있었던 나의 작업 무드.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기 위해 디자인을 다각도에서 외부적으로 보는 시각 형성.
모든 디자인 회사에 적용되는 사항은 아니지만, 브랜드를 다루는 에이전시에서는 어느 정도 공감될 수 있는 사항들이다. 열정과 감각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 안의 디자이너는 가져야 할 역량이 꽤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퇴사 후 내가 잘하는 디자인의 세부적인 분야 + 작업 무드의 스타일이 비슷한 곳을 다시 찾아야 하는 명백한 이유 또한 알게 되었다. 단순히 고용된 직원으로서의 책임감뿐만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역량과 능력이 분출하기 위해서 맞는 환경을 가는 것도 중요한 사항이다. 직원이 기능하지 못했을 때 나오는 아웃풋의 퀄리티가 계약금과 회사의 전반적인 아웃풋과도 연결되는 곳이 에이전시이기 때문이다. 디자인 결과에 따라 클라이언트의 큰돈이 오고 가는 디자인 에이전시라는 곳에서, 디자이너의 아웃풋을 내는 능력은 절대적이며 치명적이다. 개인의 작업 능력이 회사의 돈과 직결되는 비중이 큰 분야에선, 개인 스스로 그 분야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불안감과 조급함으로 잘하는 분야와 작업 스타일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채 선택한 경험이 준 깨달음은 꽤 컸다. 나의 디자인 수준을 자각하게 해 주면서도 사회 안에서 디자이너의 영향력에 대해 크게 고민할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미대를 진학함에 있어서 큰 결정과 진로 결정이 끝났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내가 떠오른다. 사회 경험을 2년 남짓 하고 현재 새로운 스타트업에서 성장하고 있는 지금, 미성숙했던 사회초년생은 지났지만 그 때에 느낀 것들을 되새김질 하며 어떻게 건강한 디자이너가 되어갈지 계속해서 고민해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