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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옷이응 May 09. 2021

죽은 글감 살려내기

<너를 공전하다>를 위한 변명


이 글은 5월8일 브런치에 발행되었던 <너를 공전하다>를 쓰면서 생각했던 고민들을 공유하기 위해 작성한 글입니다.



달력을 주제로 한 공모전을 준비하다가 완성하지 못했던 글을 꾸역꾸역 다시 고쳐서 공전과 관련한 이야기만 살려 마무리를 했다. ‘짝사랑의 감정 사이클을 한 바퀴 지나고 나면 마음의 달력으로 1년이 지나간다’는 기획은 크게 나쁘지 않았지만, 하나의 비유로 전체 글을 끌고 나가는 힘이 아직 부족했다. 달력 이야기를 쓸 때, 매 월의 이름을 사랑과 감정의 단계로 특징을 잡아 붙여 보려고 했는데, 거기에서 딱 막혀 버리고 말았다. ‘출발의 달’, ‘찰나의 달’, ‘원망의 달’, ‘침잠의 달’ 등등이 후보들이었는데, 사랑과 감정의 단계를 표현할 구체적인 단어들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연애세포는 모조리 죽어버렸고, 예전의 기억도 모두 유효기간이 지나버린 것들이라, 다가가지 못하는 연모의 대상을 멀리서 공전하며 바라보기만 하는 마음을 묘사하는 것은 애초부터 가당ㅎ지 않은 시도였다. 역부족이었다.

처음에는 공전의 대상을 ‘너’라고 지칭했는데,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고 스토킹 하는 느낌이 강해서 내가 쓰면서 내 기분까지 좀 침울해졌다. 덕분에 오랫동안 글쓰기 진도가 나가지 않았고, 고쳐 쓸 엄두도 나지 않았다. 글의 정황상 ‘너’는 자신을 맴도는 나를 알고 있다는 설정으로 읽혀서,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너’에 대한 원망이 지배적인 정서가 되었다. 억지로 억지로 마무리한 글을 으면서도,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글감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조금 가볍게 바꿔볼까’하는 마음으로, ‘너’를 ‘그’나 ‘그 아이’로 바꿔서 수정해 보았더니, 다행히 분위기가 밝아졌다. 대신 글은 나의 목소리가 아니라, 내가 설정한 화자의 입을 통한 이야기로 변했다. ‘그’를 공전한다고 쓰면 화자는 20~30대 초중반의 감성에 적당해 보였고, ‘그 아이’로 고쳤더니 이야기의 분위기가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일본 애니메이션 수준까지 확 어려지게 되었다. 기왕에 내 목소리로 쓰는 것을 포기한 김에 달라진 화자에 맞는 단어들로 고쳐가면서, 글이 조금 자연스럽게 정리가 되었다. 원래 사용되었던 ‘너’는 제목에만 남았다. 처음부터 브런치에 올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퇴고를 시작한 글이라, 제목이 좀 더 눈길을 끌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너를 공전하다’와 ‘그를 공전하다’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 고만고만했다. 대신 글에서 ‘그’라는 음절을 너무 많이 써버린 것이 마음에 걸려서, 제목에서라도 ‘그'빼기로 했다.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 내용을 ‘그 아이’와 화자 사이에 관계에 대입하는 것으로 정하면서 이 글의 구성은 대강 마무리가 되었다. 1법칙 2법칙 3법칙 모두 ‘그 아이’와의 관계에 대응할 꺼리들이 있었고, 행성의 타원 운동을 설명한 1법칙은 두번째 초점까지 언급하면서 두 번 쓰이게 되었다. 이번에 지구 공전을 공부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지구 공전 궤도는 거의 원에 가까운 타원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태양에서 멀어지면 겨울, 가까워지면 여름이라고 생각하고, ‘너에게서 멀어진 내 마음은 겨울’ 같은 상투적인 클리셰로 빠져들기 직전에 지구 남반구의 한여름의 크리스마스가 생각나서 큰 오류 없이 글을 진행하게 되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케플러의 법칙 세 가지 이외에 사용된 지구과학 상식은 인력, 원심력, 구심력이 있다. 구심력을 이야기하면서 ‘앞을 향해 멀어지는 접선을 그어 나간다’라는 문장이 마음에 들어, 사실 어울리지 않는 걸 걱정하면서도 끝까지 남겨 두었다. 3000자 글을 쓰면서, 한 문장이라도 남들이 쓰지 않았을 표현을 넣고 싶다는 욕심이 있는데, 이 욕심 때문에 나중에 다시 읽어 보고는 혼자서 무안해할 때가 있다. 이번 글에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곳이 있다면 여기일 것 같다.

<너를 공전하다>를 쓰다 보니, 오마이걸의 <Destiny (나의 지구)>라는 노래 가사가 새삼 대단스럽게 느껴졌다. 그 노래에서는 화자가 달이고 짝사랑의 대상이 지구였다. 작사가 전간디는 비유 하나를 잡아 노래 전체를 이끌어 나간 경우가 많았다. 아이돌 노래에 참여한 지구과학 3 연작이 유명했는데, 꼼꼼히 들어보면 기발한 비유들이 이어지면서 작가가 숨겨놓은 의미를 알아차리는 쾌감이 쏠쏠했다. “한 번 난 그녀를 막고 서서 빛의 반지를 네게 주고 싶은데, 단 한 번 단 한 번 그녀의 앞에 서서 너의 낮을 날고 싶은데”가 금환일식을 빗대어 태양만을 바라보는 지구를 향한 달의 마음을 설명한다는 걸 알아내고는, 글 좀 쓰시는 분들이 작사 쪽에도 많이 몰린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전간디의 가사에 비해 쫀쫀하게 구성이 되지 않은 내 글에 대해 변명을 하자면, 노래 가사에 비해 3000자짜리 산문을 구체적인 사례 없이 비유만으로 끌고 나가기가 좀 어려웠다. 비유 뒤에 구체적인 사건들을 언급하면서 설명을 더해야 읽는 분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 텐데, 비유마다 중언부언하고 지나가려니 긴장감이 떨어지는 걸 피하기가 어려웠다. 몇 번이고 더 연습이 필요한 부분이다.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글감을 겨우 살려내고 나서 그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었는데, 적다 보니 사연이 구구절절이다. 글쓰기 수업에서 합평할 때, 내가 쓴 글에 대해서 ‘이래서 어려웠고, 저래서 힘들었다’고 응석 부렸던 버릇이 아직 남아있는 모양이다. 이제는 혼자서 알아서 할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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