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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즈옹 Jul 31. 2020

모두, 잘

<에브리바디스 파인>, 커크 존스, 2009

‘프랭크’(로버트 드니로)는 기차를 타고 뉴욕으로 향하고 있다. 공장에서 전선을 코팅하는 일을 했던 그는 최근 은퇴를 했다. 안타깝게도 아내도 그 즈음 세상을 떴지만, 그래도 그는 괜찮았다. 네 명의 자랑스러운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그는 사람들에게 줄곧 아이들이라고 소개하지만, 실은 그 아이들은 그가 화학 비닐을 마셔가며 전선을 감싼 세월만큼 자라 어른이 되었다. ‘에이미’(케이트 베킨세일)는 광고회사에서 일을 하고 있고, ‘로버트’(샘 록웰)는 지휘자, ‘로지’(드류 베리모어)는 댄서, ‘데이비드’(오스틴 리시)는 뉴욕에서 예술가로 활동 중이다. 


미국 전역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가는 아이들이 오랜만에 고향 집으로 오기로 했었다. 그래서 프랭크는 설레는 마음으로 정원을 가꾸고, 집을 청소하고, 여럿이 먹을 만찬을 준비했건만 약속한 날 전날에 모두 그에게 이런 저런 사정으로 인해 못 오겠다는 소식을 남겼다. 결국 그는 ‘너희가 오지 않으면 내가 간다.’는 마음으로 자식들을 만나는 여행길에 올랐다. 그렇게 그는 지금 기차를 타고 뉴욕에 있는 데이비드를 만나러 가고 있다. 이렇게 영화 <에브리바디스 파인>은 아버지 프랭크가 자신의 아이들을 만나러 가는 여행으로 시작한다. 



몸에는 조금 무리가 될지 모르겠지만, 자식들을 만나러 가는 아버지의 발걸음은 가볍다. 프랭크가 어른이 된 자식들을 휘파람을 불며 찾으면, 아이들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달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아버지가 직접 찾아가 불러낸 아이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행복해보였다. 


하지만, 자식들을 한 명 한 명 만날 때마다 그의 마음 끝에는 씁쓸한 감정이 남는다. 다들 아버지에게 ‘잘 지낸다.’는 말을 하기 위해 급하게 덮어놓은 자신들의 삶의 얼룩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럴 때마다, 프랭크에게는 ‘왜 아이들은 엄마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에게는 상세하게 그들의 삶의 소소한 부분들은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마치 서로 떨어져 살고 있는 에이미 부부가 아들 ‘잭’(루시언 메이셀)에게 ‘아무도, 어떤 것도’ 얘기 해주지 않는 것처럼 자식들은 그에게 삶의 결정적인 부분들을 말해주지 않는다. 먼 길을 찾아와 오랜만에 함께 만나 식사도 함께하고, 사진도 찍었지만, 자식들과 물리적 거리가 가까워진 것과는 별개로 그는 끝내 좁혀지지 않은 심리적 거리감을 느끼며 헤어진다. 


뉴욕에서 데이비드를 만나지 못하고, 밤을 보낼 겸 찾은 식당. 거기서 만난 94세 할아버지의 말처럼 ‘사람도 세상도 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내내 놓쳐온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그래도 프랭크는 아이들과 헤어질 때마다, 질문을 던진다. “행복하니?”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알 것 같지만, 그래도 그는 아이들이 지금 행복한 지 확인하고 싶다. 


아버지의 질문에 자식들은 말한다. ‘네, 행복해요.’ 라고. 그들은 아버지를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다.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그들이 갈 길을 정해주었고, 그것을 완벽하게 해내지 못하면 걱정하시곤 했으니까. 그런 마음이 누구에게는 성장을 위한 격려가 되었겠지만, 누구에게는 절대 충족할 수 없는 기대가 되었다. 로지는 프랭크가 만나지 못한 데이비드가 제일 강요를 많이 받았고, 그는 아버지를 절대 실망시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프랭크가 여행을 떠날 무렵 그가 있던 지역에는 ‘앨리스’라는 이름의 강력한 태풍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는 운이 좋게도, 여행을 떠나게 되면서 그 태풍을 피할 수 있었지만 여행의 끝에는 태풍 안에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놓여있게 된다. 폐가 좋지 않은 프랭크가 약이 떨어지면서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비행기를 타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비행기 안에서 심장마비를 일으킨 그는 병원에서 눈을 뜬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의 앞에는 여행을 하며 만났던 세 명의 자식들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어로 ‘진실’을 뜻하는 ‘앨리스’의 영향 아래 있다. 아버지가, 그리고 자식들이 내내 피해왔던 진실을 오롯이 마주할 차례다. 


실은 아버지가 여행하는 동안, 아이들은 데이비드의 행방에 대해 전화로 긴급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데이비드가 멕시코에서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것으로 시작해 그의 안위에 대한 이야기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다만 이 혼란스러운 과정을 아버지에게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그렇게 된다면 ‘모두’가 ‘잘 지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프랭크는 의식불명일 때, 환상 속에서 아이들과 대화를 나눈다. 그는 아이들에게 ‘왜 거짓말을 하는지, 자신의 삶을 희생한 것의 대가가 고작 이런 거짓말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지’ 따진다. 답답함을 토로하는 그에게 아이들은 자리를 뜨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대해주세요.’ 라고. 


실은 프랭크 또한 그가 아이들에게 갖는 ‘완벽함’에 대한, 꿈을 이루는 것에 대한 기대가 아이들에게 부담에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이들이 끝내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니란 걸 알면서도 아버지는 행복하다고 대답하는 아이들의 말을 믿었다. 


한편 자식들도 아버지가 데이비드의 일을 몰랐으면 하는 마음과 자신들의 삶에 진 얼룩들을 몰랐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이 두 마음 사이에서 깊은 공백이 만들어졌다. 눈을 뜬 프랭크가 “내게도 솔직히 말해 달라”고 말한 이상, 그들은 이제는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하면서 그 공백을 무너뜨려야 한다. 


가족의 상실이라는 진실은 그들을 극적으로 다시 만나게 한다. 하지만,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와 프랭크의 대화는 꽤 오랜 시간을 두고서 이루어진다. 데이비드의 죽음을 알게 된 프랭크는 갤러리 직원의 안내로 데이비드의 그림을 만나게 된다. 그 그림에는 전신주와 전선들이 그려져 있다. 남들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는 풍경의 리듬. 프랭크는 그것을 볼 때마다 자신의 일, 그것으로 아이들을 길러낸 세월을 떠올린다. 그 마음을 유일하게 데이비드가 조명한 것이다. 프랭크가 일주일에 1000마일씩 감은 전선들이 100만 피트가 될 때까지 묵묵히 가족을 지탱했던 시간들을 데이비드는 자신의 그림에 담았다. 영화에서 자식들이 통화를 할 때마다 프랭크가 감았던 전선들이 있는 풍경이 등장한다. 먼 거리에 있는 그들을 빠르게 서로에게 닿을 수 있었던 것은 프랭크가 세월을 들여 만든 ‘가족’이라는 견고한 관계망 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영화는 ‘모두’와 ‘잘’의 의미를 묻는다. 우리는 과연 진정 ‘모두’였는지, 그리고 나는 ‘잘’ 지내고 있는지를. ‘모두 잘 지내’라는 짧고 쉬운 말을 하기 위해 우리는 ‘모두’와 ‘잘’을 각자 정의하기 위해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생각해보게 한다. 나와 사랑하는 사람은 거짓과 마음의 공백 없이 ‘모두’인가, 우리가 ‘잘’이라는 단어에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너무 많은 완벽을 요구하지는 않았는가. 


‘잘 지내기’ 위해서는 삶은 어느 한 면으로만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삶은 다면적이고 복잡한 시간과 사건의 덩어리이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건네는 ‘모두 잘 지내’라는 짧은 말 안에는 ‘이 예측 불가능한, 그렇기에 불완전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는 삶을 우리는 함께 공유하고 겪어나가고 있어’라는 관계와 시간이 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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