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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엘레인 Apr 26. 2022

젤라또 만드는 여자

새로운 취미에 힐링을 하다

최근 생전 처음으로 상담을 시작했다. 왜냐면 호주 메디케어에서 1년 동안 6번의 상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해보지 않았기에 호기심으로 시작한 부분도 있다. 


그러다가 최근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많이 쌓였었고 호주에서 동양인 이민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깊은 혼란을 겪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 질려버린 거다. 내가 이곳에서 꾸려가는 인생에 대해서 과연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가 회의가 들었다. 


공부 시작하고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지난 몇 년 동안 여기까지 왔다. 결국 대학원 마지막 과목을 앞두고 잠시 쉬는 것을 선포했다. 새벽마다 깨어서 어려운 것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었고, 기도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지나간 내 시간들을 되돌리니 대견스러우면서도 서글프더라. 결국 마음에 감기가 걸려버렸다. 

이 감기가 계절성으로 그냥 얼른 빨리 지나가 주기를 바랐지만 생각보다 좀 오래갔다. 


용기를 내서 한국인 상담사 선생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아예 일면식이 없는 사람에게 내 내면 속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정말 어려웠다. 하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아예 모르는 사람이니까 이야기하는 것이 더 쉬워지더라. 그리고 이야기하면서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을 많이 발견하게 되었다. 


가장 아껴주고 사랑해줘야 하는 건 바로 나 자신인데, 항상 나는 "엘레인, 너는 강한 사람이야. 이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야. 버텨."라며 나 자신을 힘들게 해왔던 것이다. 그리고 해결되지 않은 결국 내게 상처가 된 인간관계들, 가족에 대한 부담감, 교민 사회에서 만난 몇몇 사람들의 부정적인 말들이 내 마음속에 참 많이도 맺혀 있더라. 그렇게 나 자신을 알아가고 내 내면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상담은 두어 번으로 끝이 났지만 어려웠던 마음에 좀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또라이 같은 면도 발견했다. 누군가에게 넌 안될 거라는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오기가 생겨서 반드시 몇 년에 걸쳐서라도 그 일을 해내고야 만다는 것이었다. 내가 들었던 그 부정적인 말들이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미우시다면 절대 부정적인 말을 내게 하시지 말아 달라. 그런 개소리 들으면 청개구리 심보인 나는 반드시 잘 해내고 싶어 지니까. 그게 그들을 제대로 밟아주고 약 올릴 수 있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고의 복수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다른 한편으로는 나 참 피곤하게 살았구나 싶더라. (ENTJ의 특징이다.. 하아)


그래서 몇 주 동안은 그냥 하고 싶은걸 해보기로 했다. 마음 편하게 여기저기 여행도 가고 그냥 푹 쉬어보고 싶었지만.. 감사하게도 일들이 들어와서 그러지는 못했다. 그리고 솔직히 현재 내 상황이 마음 편하게 여행 갈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집에서 내가 쉬는 시간에 하고 싶었던 것들을 해보기로 했다. 


그게 뭘까를 생각했었다. 그중에서는 책을 실컷 읽는 것도 있었지만 나는 되게 오래전부터 젤라또 기계를 갖고 싶어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집에서 젤라또를 만든다고? 하지 마. 엄청 번거로워!" 오지라퍼가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지금 아니면 절대 못할 것 같았으니까. 사소한 일이지만 내게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쿠진아트와 브레빌을 비교했고, 여러 리뷰들을 읽고 검토한 결과 쿠진아트를 선택했다. 포인트 쌓아놓은 게 있어서 잘 데려왔다. 기계는 정말 단순했다. 



아, 진짜 부엌이 큰 집에서 나만의 아름다운 부엌을 갖고 싶다. 기계가 크기도 하고 부엌에 자리가 없어서 거실 구석 자리에 놔두었다. 처음 선택한 건 가장 기본 바닐라 아이스크림.


커스터드 크림과 우유, 바닐라 페이스트를 섞어서 기계에 넣어주었다. 



쨘. 제법 그럴듯한 나의 첫 아이스크림.

달달하게 만들었는데, 투게더 아이스크림 같은 맛이 났다. 



나의 로망, 검은깨 아이스크림. 

이걸 내가 집에서 만들다니! 엄청 감동했었다. 건강하라고 단맛을 확 줄이고 두부도 넣었는데, 그런 행동은 하면 안 되는 거였다라는 것을 깨닫기 전까지는 말이다. 



왼쪽은 밤맛 막걸리 젤라또. 머릿속에 있던 레시피를 실행시켰는데, 대박. 

이화주와는 또 다른 떠먹는 시원하고 달달한 부드러운 막걸리의 버전이었다. 


나 자신을 백번 칭찬해주었다. 이 레시피를 만들고 나서 호박 젤라또도 만들었는데, 먹느라고 사진 찍는 걸 깜빡했다. 호박 젤라또 또한 정말 맛이 뛰어났다. 그리운 한국의 가을 맛이랄까. 

호박 젤라또를 분명 1리터 만들어서 냉동실에 넣어두었는데, 그다음 날 흔적도 없이 없어졌다. 엄마가 가지고 가서 친구분들과 맛있게 드셨다고 한다. 괜찮아, 또 만들면 되니까! 


조만간 밤으로도 젤라또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나에게 있어서 젤라또의 꽃은 피스타치오 맛 아닐까? 피스타치오를 잔뜩 사 와서 일일이 껍질을 까기 시작했다. 갤러리에 기획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몇 시간을 내가 멍 때리며 이 짓을 하고 있었다. 



한번 볶아서 겉껍질까지 벗겨낸 깨끗한 피스타치오. 내가 몇 시간 동안 뭐하는 짓인가 싶다가도 이 초록색 피스타치오들을 보니 마음이 싱그러워졌다. 



나의 피스타치오 젤라또는 이 세상에서 최고였다. 사 먹는 것이랑 비교도 안되게 엄청 진하게 피스타치오 맛이 났다. 나만의 비법으로 쫜득쫜득한 젤라또가 되었고, 피스타치오의 고소한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앞으로 내 시그니쳐 메뉴가 될 듯싶다. 


한심한 과정 들일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이런 시간들과 과정들이 큰 힐링이 되어주었고, 스트레스 완화에 도움이 되었다. 혼자 이렇게 집에서 바쁘게 보내는 시간이 참 좋았다. 


여담으로 엄마가 오늘 아이스크림을 밖에서 사드셨는데, 한입 먹고 못 먹겠다고 하시더라. 내가 만든 정성스러운 건강한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그걸 먹으니 맛이 확 다르다고 하셨다. 


조만간 다이어트 젤라또를 만들고, 다시 또 슬슬 일과 공부를 시작해야겠다. 

물론, 내가 가진 문제들에 대해서 계속 기도를 하면서 말이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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