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중 일부는, 내가 좋아하는 속도에 머물러 보기
가끔은 그냥 흘려보내도 좋을 시간이라는
생각을 갖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지난 6월, 얀센 백신을 처음으로 접종했다.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12월 2일, 나는 모더나 부스터 샷을 접종했다. 다행히 미열로 끝난 이번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접종 다음날은 휴가를 쓰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굳이 내 몸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루를 내어주고, 다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란 생각도 있었다. 적당히 추운 아침, 평소처럼 일어나 노트북 앞에 앉아 나도 모르게 일을 시작했지만 금세 휴가라는 것을 깨닫곤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이불속으로 향했다.
아, 근데 뭐부터 해야 하지? 익숙하지 않았다. 그간의 휴가는 보통 여행을 떠나는 등 잠시 일상에서 멀어지는데 쓰였기에 일상 속에서 잠시 멈춤 상태를 즐기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창업을 하면서, 스스로 가장 많이 삼킨 말이 시간을 헛되이 쓰지 말자, 였기에 그날도 의미 있는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의 서랍을 여러 번, 부지런히 열고 닫다 그만 포기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단 커피 한잔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난 늘 그래 왔던 것 같다. 주어진 시간에 몸을 맡기는 것보다, 움켜잡고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마음으로 발버둥 치던 날이 많았다. 매일 아침 일어나, 가장 먼저 하는 일이 스트레칭과 문을 열어 환기하는 것인데, 정작 계속 붙잡고 있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자연스레 흘려보낼 수 있는 기회는 놓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젖었을지 모르는 나 자신을 달래고 어루만질 시간은 충분히 갖지 못했던 것이다.
커피 한잔을 옆에 두고, 남다른 필기감을 가졌다며 선물로 받은 펜을 손에 쥐었다. 더 많은 것을 기록해야겠다며 스스로 결제한 노트도 열었다. 한 달이 넘었지만, 여전히 백지상태의 노트 첫 장에 스마트폰 메모장에 기록한 내용을 옮겨 적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스마트폰에 미처 다 적지 못했던 그때의 감정과 지금의 생각을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반나절 이상, 나도 모르게 내가 좋아하는 속도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스마트워치도, 스마트폰도 어딘가에 내려둔 채 나는 오후 늦게서야 점심을 먹었다.
한동안 느끼지 못한 속도였다. 적당한 속도이기도 했다. 멈출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빠르게 흘러가는 속도에 발맞추려 노력하면서 쉽게 경험하지 못한 일이었다. 속도가 스스로를 잊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늘 그럴 순 없지만 나를 잊지 않기 위한 노력, 다양한 사람과 시간 그리고 상황에 엮여있는 나의 조각들을 잠시 멈춰 맞춰볼 수 있는 시간은 한 번씩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두 번째 커피가 완성되는 소리와 향을 맡으니 안도감이 몰려왔다. 내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아직 잊지 않았다는 생각 덕분이었다.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뀐 것 같은 느낌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정해진 시간과 구간에 따라 재생되는 영상 속에서 잠시 벗어나, 스스로 일시정지 버튼을 누를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잠시 뒤로 갈 수도, 다시 앞서 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환경을 잠시나마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역시 마음에 들었다.
두 번째 커피는, 책과 함께였다. 그리고 세 번째 커피는, 좋아하는 영화와 함께였다. 미열도 사라진 시간, 동네 공원을 걸으며 얻은 게 없어도, 잃은 것 역시 없다며 나 자신에게 조금은 더 여유로워질 순 없을까. 오늘도 괜찮았어,라고 말하는 기준이 그냥 무탈함을 나타내는 정도이면 안 될까. 가끔은 스스로의 시간에서 벗어나 정해진 속도에 따라 움직여보는 건 어떨까, 라는 생각으로 끝나갔다.
오랜만이네, 뭔가 편안해 보여.
그 한 마디에 오늘은 더없이 좋았어,라고 맺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