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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버린 것은 정말, 어디로 갔을까

FORI : Happy Re;Brith DAY 展

by 자그니

가끔 날을 정해 미술관을 돌아다니곤 한다. 예전 미술 잡지를 만들던 시절에 붙은, 오래된 버릇이다. 자주 가지는 못하니까, 보고 싶은 전시를 찜해 놓고, 몰아서 보기. 맛있는 과자를 숨겨두고 아껴 먹는 그런 버릇이랄까.

어제는 날을 잘못 잡았다. 충무로에서 방송이 끝난 김에 광화문 근처 미술관들을 돌아보자 했는데, 하필 월요일이었던 탓이다. 매번 수요일이나 금요일에만 찾아갔기에, 다들 월요일에는 쉰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덕수궁 미술관 ‘신여성 도착하다’ 전시 휴관, 대림 미술관 휴관, 서울 역사박물관 ‘1904 서울 풍경’ 도 휴관, 공근혜 갤러리 ‘Snow Land’ 전시는 아예 어제 날짜로 전시 끝. 유일하게 열려있던 곳이 신한 갤러리 광화문 ‘FORI : Happy Re;Brith DAY’ 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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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갤러리에 들어서니 왠 낯선 로봇이 나를 반긴다. 가만 보니, 나, 이 로봇을 알고 있다. 아니 이 로봇이 원래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다. 이 로봇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로봇 대부분을 알고 있다.


노트북용 DVD 드라이브, 진공청소기, 플로피 디스켓, 카세트테이프, 레이저 프린터. 어쩌면 내가 쓰다 버렸을지도 모를 것, 아니면 내가 버린 것의 형제들. 그것들이 로봇으로 다시 태어나 내 눈앞에 있었다.


정말 ‘재-생일을 축하합니다’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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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버려진 제품을 모아 로봇으로 다시 만들었다 생각한다. 다시 태어나도, 원래 어떤 제품이었는지 알아보기 어렵지 않다. 원래 쓰임새가 있던 애들이라, 변한 다음에도 몸에 원래 가지고 있던 쓰임새가 그대로 새겨져 있다.


작품들은 그래서 두 번 봐야 한다. 멀리 떨어져 이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가까이 다가가 원래 어떤 애들이었는지 살펴본다. 나는 수명을 다해 폐기되는 제품을 본 일이 별로 없다. 소비사회에서, 많은 제품은 그저 시간이 지났기에 버려진다.


... 하지만 정말 다시 태어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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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지도 모르겠다. 장소는 여기가 아니라 버려진 제품의 별이겠지. 여기에 있는 것은 그저, 그 별의 풍경을 찍은 사진이 아닐까. 아니면 작가가 꾸는 꿈일까. 버려진 것들이 다시 태어나 행복하게 살아가는 별에 대한 꿈. 그저 버려졌기에 사라져 간 것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


몰래 생각했다. 그러니까, 나는. 버려지지 않기를. 버려져도 누군가 기억해 주기를. 다시 태어난 로봇들이 내게 말해주는 어떤 이야기를 들으며, 나쁘게도 덧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버림받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버려진다면, 가끔은, 기억해 주면 좋겠어요-하고.


정말, 덧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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