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그니 Dec 31. 2022

명품 드레스 사러 파리에 간 누님 이야기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

동화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팔자 좋게 쉽게 쉽게 이런저런 일이 일어났다가, 주인공 편의적으로 풀리는 이야기… 질색이죠. 


인생이 그렇게 쉬워요? 세상이 그렇게 만만해요? 먼치킨 장르나 이세계 장르 이야기를 보다가 포기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너에게 맞게 돌아가는 게 아니거든요. 열 살 때나 상상하던 일을 지금도 계속하기엔 질리기도 했고요.


… 영화 ‘미시즈 해리스 파리에 가다’는 딱 그런 이야기입니다. 

현실을 가장한 동화죠. 

그런데 재밌습니다?




진짜입니다. 배경은 1957년.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실종된 남편을 기다리며 가사 근로자로 일하는 에이다 해리스(레슬리 맨빌 분)가 주인공입니다. 일하던 집에서 보게 된 ‘크리스챤 디올’의 맞춤 드레스에 꽂힌 다음, 그런 드레스를 사겠다고 돈을 모아 파리에 가서 옷을 사는 영화죠.





나이 많고 가난한 파출부가 어떻게 돈을 모았을까요? 지금 시점으로 환산할 경우, 월급은 대략 200만 원, 옷값은 최소 3천만 원은 됐을 텐데요(영화에선 500파운드). 어렵지 않습니다. 


먼저 

1) 스포츠 토토(...)에 당첨됩니다. 

2) 남편 사망이 확인돼서 미지급 연금을 받습니다. 

3) 개 경주에 돈을 걸었다가 돈을 다 잃는데, 다행히 개 경주 직원이 몰래 그녀의 돈 일부를 다른 개에 걸어서, 오히려 돈을 벌었습니다. 

4) 잃어버린 반지를 되찾아주니 주인이 사례를 합니다. 


쉽죠?


물론 5) 난방용 가스도 끊고(생활비 절약) 부업도 하면서(수입 증대) 돈을 모으기도 했지만, 좀 지나치게 운이 좋죠. 이쯤 되면 제가 영화를 보다 말고 물러나야 합니다. 개연성 없는 드라마 볼 때 굉장히 괴롭잖아요? 이렇게 우연이 남발되는 이야기는 저의 정신에도 염증을 일으킬 가능성이 큽니다. 빠르게 도망가야죠.


… 문제는, 그런데도 이상하게 주인공이 밉지 않다는 겁니다.


아니, 밉지 않은 게 아니라 오히려 사랑스럽습니다. 60대(주연배우가 1956년생입니다.)로 추정되는 등장인물인데도요. 60대 주인공이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영화라니, 이런 건 또 진짜 처음이네요.





처음부터 귀여운 건 아닙니다. 일 잘하고 성격 좋지만 그래도 세상 물정은 아는, 자기가 세상에서 ‘존재감 없는’ 취급받는 위치에 있다는 건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화는 결코 ‘머리가 꽃밭’인 이야기를 늘어놓지 않습니다. 적당히 현실과 환상을 잘 버무린 틈에서 동화 같은 이야기를 추려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주인공이 동화 같은(...) 사람이거든요. 남편 사망 사실을 확인하고 삶을 지탱하던 믿음이 무너져 힘든 것도 알고, 전쟁의 상처가 여전히 남아있는 상황에서 꽃 같은 드레스에 꽂힌 마음도 이해하지만, 그래도 그걸 진짜로 사겠다고 도전하는 사람은 현실에는 없단 말이죠. 

+ 그걸 또 말리지 않고 지지하는 친구도. 

+ 어떻게든 그녀에게 옷을 팔겠다는 디올 직원들도.


재미있게도, 남이 자기를 무시하는 걸 가만두고 보는 사람은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물건을 살 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막무가내로 자기에게도 옷을 팔라고 주장하는, 파는 처지에서 보면 민폐 같은 짓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과 그 사람이 하는 일을 제대로 존중합니다. 보면서 계속 이 사람은 사랑받을 수밖에 없겠다-라고 생각했던 이유입니다.





솔직히 물건 사면서, 이걸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생각하는 사람, 몇이나 있을까요? 하지만 미시즈 해리스는 그런 만드는 이를 존중합니다. 자기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을 존중합니다. 


크리스챤 디올의 재봉실을 거닐다가 재봉 중인 옷을 보고, 이건 재봉이 아니라 달빛을 만드는 거라고, 내가 천국에 온 거냐고 말할 때는 진짜… 내가 거기서 옷 만들고 있었다면, 100% 이 사람 편이 됐을 겁니다.


결국 미시즈 해리스는 옷만 사는 게 아니라 본인도 썸타고, 커플도 이어주고, 대량 해고에 맞서 파업을 선동하고, 기업을 혁신하면서 인재 유출을 막는 역할까지 맡습니다?





그렇게 흐뭇하게 영화를 다 보고 나니, 뭐랄까, 연말연시에 작은 선물을 받은 기분입니다.


나이 들어도 사랑은 할 수 있구나(?), 뭐 하나에 꽂혀서 노력하던 때가 그립다(??), 파리는 참 예쁘다(촬영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했다지만), 패션쇼가 이렇게 시작된 걸까, 제작사가 크리스챤 디올이냐(전면 협력 했다고 합니다), 모델 나타샤 역할 배우(알바 밥티스타) 참 예쁘네 등등 여러 가지 생각하게 된달까요.





가볍게 웃고 즐길만한 이야기를 찾는 분에게 권합니다. 나이 들어 연애 세포가 다 죽어버린 사람에게도. 조금 지루하다고 여겨지는 당신 삶에, 맛난 조미료가 되어줄 영화입니다. 그리고 전 영화가 끝나고 나서, 맞아 맞아 실존 철학은 미스터리 추리 소설이야 이러고 있다는 뒷이야기(본 사람만 압니다.).






* 그나저나 회계사로 나오는 안드레 포벨(루카스 브라보 분), 너무 대놓고 입생 로랑 아닌가요?

매거진의 이전글 연애 좀 해봤던 당신에게, 이터널 선샤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