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음악이 가져다준 새로운 경험 ③
* 지난 2006년(...) 대학원 문화지형연구 수업 레포트로 제출된 글, 마지막입니다. 자료를 찾다가 발견해, 잊기 전에 백업해 놓습니다. 이때 정말 부끄러운 주장을 했었네요.
디지털 환경이 보편화되는 순간, 우리는 많은 것들이 알게 모르게 뒤죽박죽 되고 있는 걸 목격한다.
누군가는 진짜 현실과 가상현실을 둘로 나누고, 가상현실을 분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이 세상이 원래부터 가상현실이었다고, 어차피 우리의 감각에 의존해서 파악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새삼스럽게 뭘 걱정하냐고 말한다.
누군가는 가상이 가상을 낳고 다시 그 가상이 가상을 포장하는 매트릭스와 팬텀의 시대, 시뮬라시옹의 시대라고 말한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알 수 없으며, 앞으로도 아무것도 모를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 의지와는 상관없이 세상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 혼잡한 세상에서, 우리는 디지털 사회의 규칙과 아날로그 사회의 규칙이 혼종 된 생활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의 아날로그 사회 구조에 편입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컴퓨터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사는 것은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느껴진다.
그렇다고 새로운 디지털 사회에 편입되어 있다고 느끼고 있지도 않다. 이메일로 이력서를 보내서 편해졌다고 실업의 고통이 줄어들까? 온라인으로 성적표를 확인할 수 있다고 해서 시험의 압박이 줄어들까? 돈 없고 빽 없으면 서러운 것은 마찬가지인데 새로운 세상 운운하는 것은 사치다.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이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한 힘과 능력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꾸 해체 당해 노예로 길들여지려고 하는 나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조립하는 일이다.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은 컴퓨터와 미디어 장비 때문에 예전과는 다르게 변하고 있다. 이제까지는 누군가가 콘텐츠를 던져주면 우리는 그것을 받아먹었다. 편하고 편리했지만 자유는 없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정보를 재생산하거나 새로운 정보를 생산했다.
블로그의 전면적 등장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변화다. 처음에는 미디어가 개인화되면서 사람들이 방송사나 기존의 미디어의 자료를 재인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인 미디어가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반대로 방송사들이 중요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개인 블로그의 사진이나 코멘트들을 이용하여 뉴스를 진행하는 일이 잦아졌다.
이런 변화는 그다지 특이한 일도 아니다. 흔해졌다. 흔해졌다는 것은 흐름이 그쪽으로 기울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흔해지는 것의 힘은 일상을 좌우한다. 앞으로 작은 디카나 MP3 플레이어, 휴대전화와 같은 것들이 중요한 미디어로 변할 것이다. 이제 우리 자신이 미디어다. 우리가 현대의 권력이라 일컬어지는 지식과 정보를 다루는 힘의 실체다.
우리가 미디어가 됨으로써 나타나는 또 하나의 변화는, 다양성의 증가다. 선택과 복제가 쉬워진 디지털 공간에서 다양성은 예측할 수 없는 모습으로 증가한다. 무한해 보이는 음악 파일 속에서 헤매던 사람들은, 스스로가 미디어화되면서 새로운 놀이와 새로운 생활양식을 찾아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음악을 듣기도 하고, 별로 알려지지 않던 사람이나 음악을 찾아내서 소개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성과 예측 불가능성 때문에 사회 시스템의 틈새는 자꾸만 커지게 된다. 학자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일들이 자꾸 생겨난다.
하나의 경향성이 있다면 그것은 학자나 기업의 예측이나 이해관계가 아닌, 더 많은 사람이 바라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갈수록 불필요한 간섭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자신들의 스스로 규칙을 세우고, 비슷한 사람들끼리 느슨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놀이와 정보를 생산하면서 세계의 변화를 재촉하게 될 것이다.
... 그것이 꼭 좋은 것이라는 확신은 없지만.
그 가운데 우리는, 새로운 개인화된 음악 환경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제 나는 단순히 음악을 듣기만 하는 내가 아니다. 음악은 콘텐츠에서 나 자신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진화한다. 내가 누구에게 정보를 얻었는지,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그리고 그 음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해진다.
다시 말하지만, 나 자신이 미디어이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선택하고 공개하는 것들이 내 정체성의 일부를 구성하게 된다. 내가 손에 쥔 개인용 오디오 기기에는 몇백 곡이 넘는 노래들이 담겨있다. 이제 CD와 테이프로 표현되던 음악의 물질성은 MP3 플레이어라는 형태를 통해 다시 나타나게 된다.
컴퓨터 안에 있는 음악 파일과 이렇게 손으로 잡히는 음악 파일들의 뭉치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것은 내가 선택한 것이고, 내 기억 속의 장면마다 함께했던 노래들이다. 음악은 우리 과거의 기억들, 경험들과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해주는 미디어다. 음악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부분들 사이의 다리다.
또 음악은 인간 행동으로서 친밀감, 일관성, 지속성, 동일성의 경험을 해줄 수 있는 선물이다. 반복된 청취를 통해 우리가 음악에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그리고 음악에 대해 좀 더 알게 됨으로써 신뢰감이 증가한다. 음악이 표현하는 정서와 더 많이 접촉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상호작용하면서 더 깊게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음악치료학 입문, 임은희, 아시아미디어리서치, 1999, P84).
나는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음악을 선택함으로써 나 자신의 감정을, 상황을 통제할 것이다. 그로 인해 내 삶의 경험은 훨씬 따뜻하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나르시시즘이라고 해도 맞다. 하지만 내 인생이라면 내가 찍는 영화가 되어도 나쁘지 않다. 그런 다양성으로 인해 세상은 점점 예측 불가능해질 것이며, 재미있어질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간단하다. 필요하고 재미있는 정보들을 타인에게서 받고, 내가 가진 정보들을 그들과 나누고, 서로 이야기하고 소통하면서 공유하는 일. 그 가운데에 나는 내가 되고, 그들은 그들이 되고, 우리는 점점 우리가 되겠지만. 그러다 잠깐, 예전처럼, 음악과 풍경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면, 맘대로 펑펑 울어버리면 그만이고.
지배적인 권력은 예나 지금이나 현존하는 문화가 마치 영원불변의 진리처럼 생각해 이를 거부하거나 이탈해 새로운 문화를 추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려 한다. 새롭게 창조된 문화를 둘러싼 갈등은 항상 존재하며, 기존의 권력을 쥔 사람들은 그것을 지키려고 갖가지 수단을 이용해 형식과 틀을 만들어 규제하게 된다.
디지털과 네트워크로 요약되는 정보화 사회의 기술 역시 마찬가지다. 일정한 기술들의 발전에는 매우 다른 민주주의의 모델이 함축되어 있다. 새로운 기술이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있어서, 서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존의 역사적/조직적/환경적 영향에 따라 정치/사회적으로 서로 다른 시각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발전된 기술을 어떠한 형태로 사용하는가-라는 문제는 여전히 사회적 선택의 문제이고 정치적 결정의 문제이다.
사이버 스페이스는 그래서 항상 싸우고 있다. 테크놀로지 개념에 ‘어떤 지식’을 특정한 방식으로 조직화하고 운용하는 방식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며, 사회적 관계로서의 새로운 문화의 창조와 소통은, 그것에 관심 있는 이용자들의 실천으로 관계의 재정립이 결정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존 자본과 지배 권력은 계속해서 인터넷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구조로 재편하려고 한다. 더 많은 사람을 상대로 한 국경 없는 시장, 끝없이 즐기며 소비를 낳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들에겐 정보의 공유보다 팔아먹을 수 있는 특정 정보가 필요하며, 개인의 사생활과 익명성보단 전자상거래에서 신원을 보장해 주는 개인 정보가 필요하다.
우리에게 개별적인 경험을 제공해 줬던 개인화된 음악 환경은, 디지털 시대로 발전하면서 혼돈에 가까운 상태로 전락했다. 옛 것은 무너지고 새로운 것은 아직 등장하지 않은 상태. 하지만 몇 년이 지나고, 새로운 문화의 싹은 이미 돋아났다. 그것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흐름만큼은 대충 짐작된다.
분명히 디지털 세계는 우리가 생산해 내는 콘텐츠를 중심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과거 인터넷의 중심에 있었던 힘은 뿌리째 흔들리게 될 것이다. 물론 앞서 이야기했듯이, 어디로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른다. 예측 불가능하다-라고 당당하게 얘기할 수밖에 없는 시대다. 하지만 언제는 예측 가능한 것이 있었던가.
하나만 기억하자.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다. 서로 관계 맺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 그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우리는 사회적 존재인 자신과 또 다른 사회적 존재인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만 교류할 수 있으며, 이것을 억압하는 장애물은 제거되어야 한다. 이런 장애물을 제거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약간의 자유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1. 음악치료학, 최병철, 학지사, 1999
2. 음악치료학 입문, 임은희, 아시아미디어리서치, 1999
3. 하이터치 문화, 조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2003
4. 컬트브랜드의 탄생-아이팟, 리앤더 키니, 미래의창, 2006
5. 디지털미디어 100년후를 상상한다, 미즈코시 신, 한국학술정보, 2000
6.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정보사회와 인간의 조건, 아담 샤프, 한길사, 2002
7.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 미메시스, 현실문화연구, 1993
8. 디지털경제의 신승부처-퍼스널 미디어, 현대원 박창신, 디지털미디어 리서치, 2004
9. 월간 민족예술 2000년 10월호
10. 미디어의 이해, 마샬 맥루한, 한길사,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