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말 비엔나를 읽다
여기 모든 사람이 함께 모여있던 공간과 시간이 있었다. 프로이트, 바그너, 클림트, 쇤베르크, 슈니츨러와 코코슈카, 덧붙이자면 마하, 그리고 그 이후의 비엔나 학파, 에곤 쉴레, 비트겐슈타인… 등이. 바로, 19세기말~20세기초 비엔나(빈)라는 도시다.
『세기말 비엔나』는 바로 그 시대를 되살려보는 책이다. 옛 것들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은 이제 막 태어났던 그 시대에 대해. 낡은 것들은 소리내며 무너져가고 있지만 모두 어찌하면 좋을지 몰랐던 그 시대에 대해. 따르고 배워야할 어떤 것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대해. 세기말이라는 이름의, 씨앗만을 가득 품고 있는 황무지에 대해.
“사회적/정치적 해체의 진동이 날카롭게 느껴지던 세기말의 비엔나는 무역사적인 우리 세기의 문화를 싹틔운 가장 비옥한 온상 가운데 하나였다. 그 위대한 지적 혁신자들은 모두 자신이 양육된 19세기 자유주의 문화의 핵심을 이루는 역사관에 연결되어 있던 자신들의 연대를 어느 정도는 고의적으로 끊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구체적인 역사적 맥락 위에서 그 문화적 변형 과정의 출발점을 깊이 파고드는 것들이다.(19)”
이 책은 프린스턴대학의 칼 쇼르스케 교수가 강의를 하다가 부딪힌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 씌여졌다. 그 의문점은 하나로 통합해서 말하지 못할 유럽 역사, 니체 이후의 19세기 역사에 대한 것이다. 그때는 너무 다양한 흐름들이 발생하기 시작해서, 하나의 덩어리로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왜 그랬던 것일까? 무슨 이유가 있었기에 이런 단절과 생성의 흐름의 시작된 것일까.
여기서 저자는 무리해서 하나의 단어로 그 시대를 뭉뚱 그리지 않는다. 대신 그 흐름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읽어내는 방법을 택한다. 그 방법은 바로 시간과 공간의 실로 짜는 시대라는 옷감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 문화가 처음 구상되고 태어날 때 역사가 부여해준 특징을 밝혀낼 수는 있다(28)”고 믿는다.
“세기말 시대의 비엔나는 그런 정치적 토대 위에서 여러 학과를 포괄하면서 이루어지는 과목 연구를 하기에 매우 유리했다. 그 도시의 지식인들은 여러 분야에서 거의 동시적으로, 유럽 문화계 전체에서 비엔나 ‘학파’라 불리게 되는 혁신을 차례차례 이루었다. 하지만 업적이 국제적으로 좀 늦게 인정된 분야에서도 그들은 … 그 사회 내에서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으로 인식된 전통의 전복적 변형과 비판적 개조에 가담했다.(29)”
이 책에서는 다루는 세기말은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으로 인한 빈체재의 종말부터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까지라고 보면 맞을 듯 하다. 그 시기의 비엔나는 짧은 순간에 많은 변화를 겪었다. 사실 비엔나는 몰락한 제국의 꿈 위에 서 있는 도시였다.
중세 후반 유럽을 호령했던 신성로마제국의 영광은 이미 무너진 상태에서, 차례차례 지배권을 잃어가다가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에게 패하고, 나폴레옹의 몰락뒤 형성된 반동적인 빈 체제(1815)의 중심에 있었던 잠깐 있었다가 1866년에는 비스마르크의 독일제국에서도 제외되는 몰락한 꿈의 도시.
그렇지만 유럽을 휩쓸었던 민족주의/자유주의 혁명의 물결 가운데에 혼자 고고하게 서 있던 도시이기도 했다. 그 흔한 식민지(?) 하나 가지지 못했으면서도 민족 구성은 러시아 다음으로 복잡한 나라 오스트리아의 수도. 그 안에서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시대의 흐름에 의해 권력을 갖게된 자유주의자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앞서 말한 빈 체재의 몰락때문이었다. 빈 체재의 몰락으로 인해 왕가는 힘을 잃었고, 오스트리아의 자유주의자들은 이를 기반으로 혁명 없이도 입헌정부를 수립할 수가 있었다. 그것이 1860년대에서 1900년까지의 기간이다. 이 시기에 자유주의자, 부르주아들은 민중과 왕가 사이에 불안정한 양발 걸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 부르주아들이 자신의 힘을 과시하듯 만들어낸 도시 구역이 ‘링슈트라세’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르네상스 고딕풍 건물들을 거느리며 뻗어나간 ‘링슈트라세’의 위세는, 순식간에 “귀족들과 같은 역사적 각인”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르주아들이 고안해낸 건축물이었다.
하지만 민중의 지지가 없는 권력은 금방 그 한계를 드러낼 수 밖에 없는 법. 결국 1895년 기독교사회당이라는 우익/반유태주의 정당에 의해 ‘칼 뤼거’가 시장에 당선되게 된다. 자유주의자들은 1900년 무렵에 의회 권력을 상실했고 그 뒤 다시는 되찾지 못했다. 참고로 가스스토브, 가스등, 욕실과 수세식 변소의 보급등이 이뤄진 것도 자유주의자들의 시기였다.
세기말 비엔나의 진면목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스스로의 힘이 아니었기에 금방 맞을 수 밖에 없었던 정치적 위기와, 그 정치적 위기가 보여준 고전적 자유주의 인간관의 해체. 그로인해 등장한 좌절감과 그 좌절감이 낳은 감정과 본능을 가진 인간=심리적 인간의 등장.
이들이 가진 좌절감은 “낭만주의적”이고 “유토피아”적인 가치가 무너졌을 때의 좌절감과 비슷하다. 이 당시의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견해에 따라 하나의 유토피아를 창조하려다가 무너졌고, 대신 마치 예술가들처럼 ‘잃어버린 신화’를 대신하기 위한 새로운 것을 창조하길 원했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분리파의 모토는 어쩌면 이에 딱 들어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비엔나에서 자유주의자들의 시대는 상당히 이중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였다. 어떤 혁명적 사건이 아니라 외부에서 강제된 변화는 자유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신조를 위해, 봉건제를 능가할 수 있는 제도와 개념들을 ‘고안’하도록 만들었다. 반면, 그것은 자유주의자들 자신을 공격할 수 있는 무기들을 민중들에게 쥐어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자유주의자들은 민중의 움직임을 봉건제적 통치 행위를 통해 차단하려고 했다. 위를 향해 제대로 분출 될 수 없는 정치적 열정들은 ‘합리적인 행위’보다 ‘맹목적이지만 열정적인’ 행동을 불러냈으며, 그것은 결국 범게르만주의, 기독교사회주의, 시오니즘처럼, 전혀 다른 모습이지만 ‘극단적인 성격’만은 닮은 세 쌍둥이를 낳았다. 그들은 성격은 다르지만 ‘생존의 위협 속에 좌절한 대중의 욕망’을 불러냈다는 점에서는 닮았다.
그나마 비엔나에 있어서 다행이었던 것은 살롱과 카페라는 장소의 존재다. 극단적 정치 세력의 성장과 함께 좌절당한 지식엘리트들에게, 살롱과 카페는 다양한 분야의 지식엘리트들이 각각의 이념과 가치를 토론하고 공유하는 장소였으며, 함께 교류하는 장소였다.
이런 교류를 통해 이들은 한 분야의 엘리트가 아니라 다양한 재능을 가진 이들이 될 수가 있었고, 이들은 정치학, 문학, 건축 등 여러 분야에서 동시적으로 전선을 형성할 수가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어떤 동일하거나 비슷한 덩어리로 보는 것은 무리다. “무너진 폐허”에서 “좌절감”을 먹으며 성장한 이들은 각각 그 성격이나 행동이 달랐다.
유토피아를 꿈꾸며, 대중들의 숭배를 받고, 좌절할 줄 몰랐던 비엔나의 지식인들은 20세기 초반이 되자 점점 현실을 인정하고 변화하기 시작한다.
“1880년대에 사회상황이 변하자 예술은 타협하여 신분을 표시하는 도구가 되었고, 부의 증대로 계급과 대중간의 균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르는 1850년대에 가졌던 예술의 ‘강력한 장및빛 날개”가 “투박함을 없애고”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을 획득하도록 인류를 도와주리라는 희망을 상실했다.(404)“
교수직을 얻기 위해 현실에 고개숙여야했던 프로이트는 귀엽게 봐주자. 구스타프 클림트는 자신의 주장을 모두 접고 “쿤스트쑈”라는 예술가 공동체로 후퇴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슈티프터처럼 소설속의 로젠하우스라는, 현실과 괴리된 귀족의 이상향으로 도망가는 것, 그래서 그 도망침 자체가 한 시대가 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버리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나마 도망칠 수 있었던 이들은 나았다. 쇤베르크, 코코슈카, 에곤쉴레처럼 도망칠 수도 없이, 폐허 자체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그 폐허를 이를 악물고 바라보는 수 밖에 없었다.
“다시 한번, 쇤베르크는 예술이 진리를 부패시키는 데 대한 분노를 쏟아낸다. 그 고발 속에서 오스트리아 전통을 성정시킨 주요한 힘들에 대한 전적이고도 포괄적인 거부의 음성이 울려나온다. 그 힘이란 … 세기말의 자유주의의 위기에서 예술 그 자체를 가치의 근원으로, 종교의 대체물로 보려 한 태도등이다.(479)”
솔직하게 고백하자. 이 책을 읽으면서 세기말 비엔나를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맞다. 하지만 그것을 온전히 읽어냈다는 것은 아니다. 유럽의 역사, 특히 오스트리아의 역사에 대해서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상태에서 이 세기말 비엔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그 가운데 쇤베르크를 만나면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었다는 사실에 대면하고서는 속으로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이것이야 말로 쇤베르크가 경멸했던 바그너가 가지고 있는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감성이 아닌가.
하지만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잠시 접고, 세기말 비엔나가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본다. 이런 이야기들을 조근조근 들려주면서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 나는 그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처음에는 무서웠다. 세기말 비엔나의 정치 사회를 읽으면서, 자유주의자로 시작했던 정치인들이 어떻게 대중들의 좌절과 분노를 먹으면서 성장하는지, 그 분노를 이용할 장치들을 고안해서 주도적인 카리스마 지도자들이 되는 지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현실과 많은 부분들이 겹쳐보여서 정말 무서웠다.
그렇지만 너무나 다른 것은, 이 나라에서는 그것을 “천박하다”라거나 교양없다고 말할 수 있는 봉건 귀족들 조차도 없으며, 자유주의자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이다. 이 나라는 천박함이 대세가 되었다. 클림트의 후기 그림들은 에곤 쉴레의 드로잉과 함께 ‘낭만적 청년’들에게 발견되어, 그들을 포장하는 ‘상징’이 되어버렸다. 정치인이 대중을 우롱해도 ‘국익’을 위해서라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쇤베르크에게 영향을 받았던 백남준은 외국에서 죽었고, 386세대는 구시대 봉건정치인들을 통해 정치에 데뷔한 이후로, 자신들만의 체계와 개념들을 고안조차 해놓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혁명의 시대도, 자유주의의 시대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했는데 어느새 ‘극우주의자’의 시대로 넘어가려고 하는 것 같으며, 우리는 쇤베르크를 닮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처음부터 이런 것이려니-하고 살아간다. 우리는 증오하지 않는 위선자가 되어버렸다.
어쩌면 좋을까. 이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단 말인가. 그러자 쇤베르크가 말한다.
“그의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명령한 것처럼 쇤베르크는 인류에게 호소한다. 정원의 문화를 영원히 포기하고 자신이 내세우는 그 반대 이상인 황무지를 받아들이라고 말이다.(480)”
…하지만 대체, 그걸 어떤 누가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 현재 이 책은 '세기말 빈'이란 제목으로 개정판이 출간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