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별 생각 없이 바꾼 것이 삶을 담백하게 만들어 줄 때가 있다
1. 며칠 전부터 스마트폰을 '흑백 모드'로 놓고 쓰고 있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색을 뺐다. 바탕 화면이나 아이콘을 그렇게 바꾼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에서 보이는 모든 것이 흑백 사진처럼 보인다. 낯설기는 하지만 지난 2014년부터 스마트폰에 들어갔던 기능이다.
흑백 모드로 놓고 쓰면 모든 것이 담백하게 보인다. 사진은 흑백 사진으로, 영화는 흑백 영화로. '킨들' 같은 전자책 리더기를 스마트폰처럼 쓰는 느낌이다. 색이 유혹하지 않는다. 심심하다. 누군가가 아무리 벗고 나와도 야하지 않다. 맛있는 음식 사진도 맛있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고양이도 귀엽지가 않다.
그런데도, 묘한 매력이 있다.
2. 흑백 모드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애시당초 일반적인 사용자들을 위해 나온 기능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능은 색각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기능이다. 색을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이런 축복을 일부러 즐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가? 이 세계에서 색이 사라진다면, 얼마나 끔찍할 지, 한번 상상해 보라. 회색빛 음식, 회색빛 꽃, 회색빛 하늘을 좋아할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하지만 가끔, 그런 축복이 문제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색에 쉽게 영향을 받는다. 본능적인 레벨에서 반응한다. 색은 사물의 어떤 상태를 상징하고, 근본적으로 삶과 죽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쉽게 반응하는 것을 이용해 디자이너/설계자들은 색을 이용한다. 이걸 봐. 이건 중요해. 이걸 클릭해 보지 않을래? 이런 유혹의 말 대신 색을 사용한다. 너무 많은 정보가 흘러다니는 요즘 세상에선, 이런 색을 이용한 '지시'는 우리를 피곤하게 만든다. 피곤한데도, 게속 들여다보게 만든다. 자극, 자극, 자극.
3. 흑백 모드를 사용해 보면 안다. 그동안 우리가 스마트 기기에서 보여주는 '색 자극'에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는 지를. 당장 뉴스를 읽다가 사진에 끌려 다른 기사를 클릭하게 되는 일이 확준다. 이메일이나 RSS, 전자책, 만화를 읽을 때도 눈이 편하다.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다가 눈을 떼도, 예전처럼 시야가 확 어두워진다거나 하는 일이 줄어든다. 그래봤자 백라이트라서 전자 잉크만큼 편할까- 싶었는데, 그만큼은 아니어도 꽤 편하다.
대신 심심하다. 색 하나만 빠졌는데, 게임이 재미가 없다. 사진을 봐도 생동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찍히기는 컬러로 찍혀서 저장되긴 하는데, 사진을 찍는 화면마저 흑백이다. 영화는 흑백 영화 느낌이 아니라, 뭔가 탁한 회색 영화 느낌으로 바뀐다. 그러니 보기 편한데도, 오히려 스마트폰에 손이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스마트폰이, 나를 유혹하지 못한다. 내가 필요한 일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장단점이 너무 분명해서, 모두에게 추천할 수 있는 모드는 아니다.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읽는 일이 많고, 스마트폰을 업무용 도구로 주로 활용하거나, 스마트폰 사용에 시간을 뺏기기 싫은 사람에게나 적당하다. 사진이나 게임을 좋아한다면 예전처럼 그냥 쓰는 것이 좋다. 모노크롬 세상은 모두를 위한 세상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흑백 모드가 주는 담백한 맛에 마음을 뺏겼다.
일단 주로 전자책을 읽는 태블릿PC에 셋팅해 놓고 쓰고 있다. 스마트폰에도 셋팅하고 쓰고는 있는데, 사진 찍을 때 조금 불편해서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중이다. 본의 아니게 옛날 필름 카메라를 쓰는 기분을 조금은 맛보고 있다. 내가 찍긴 찍는데 결과물을 확신할 수가 없으니...
그래도 편하고 좋다. 색 자극 하나만 빠졌는데도 사용 경험이 확 바뀐다. 신기하다. 스마트폰을 좋은 텍스트 읽기 도구로 사용하고 싶다면, 어두운 곳에서 많이 본다면 추천한다. 스마트폰과 당신, 그 사이에 놓여 있는 관계에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있는 좋은 방법이니가.
스마트폰 흑백모드 설정 방법
- 아이폰/아이패드 : 설정 → 손쉬운 사용 → 흑백 모드 on
- 삼성 스마트폰(일부) : 설정 → 접근성 → 카테고리 → 시각 → 흑백 음영 on
- 기타 안드로이드 스마트폰 :
① 설정 → 기기 정보(디바이스 정보) → 빌드 번호-를 일곱 번 터치해서 개발자 모드(개발자 옵션) 활성화
② 개발자 모드 →하드웨어 가속 렌더링 →색상 조정 시뮬레이션 →단색형 색각(또는 전색맹, monochromacy)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