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미국 연방거래위원회(FTC)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클릭 한 번에 가입 서비스나 구독 물건을 취소할 수 있어야 한다는, '클릭 투 캔슬'(Click to cancel) 규정을 발표한 것이다. 이 규정은 '고객이 명시적으로 거부 의사를 표현'하지 않으면 구독이 취소되지 않는, 모든 네거티브 구독에 적용된다.
간단히 말해 이젠 제발 '해지 방어'를 하지 말라는 말이다. 어도비가 성공하고, 애플이 앱스토어 개발자들에게 권하면서 확산됐던 지긋지긋한 구독 서비스에서, 조금이나마 쉽게 탈출할 길이 생겼다.
지난 몇 년간 이런 일을 너무 많이 겪었다. 아이패드에서 잘 쓰던 노트앱이 새로운 버전을 출시해서 업그레이드해서 쓸까 했더니, 이미 돈 주고 샀는데 또 매달 돈 내라고 한다. 동영상 찍는 앱을 샀는데 그건 이제 구버전이라며, 신버전은 매달 돈 내며 쓰라고 한다.
싼 것도 아니고, 보통 6개월에서 1년 정도 쓰는 비용이면, 예전에 1회성 지불했던 것보다 더 많이 낸다. 그렇다고 다른 대안을 찾자니, PC와는 달리 '앱스토어'에선 좋은 대안을 찾기 힘들다. 앱 마켓이 사실상 독점 운영 상태라서 그렇다.
앱만 그런 것도 아니다. 구독 서비스는, 언제부턴가 우리 삶 구석구석에 들어왔다. 영화를 보려고 해도 가입, 음악을 들으려고 해도 가입, 쇼핑을 하려고 해도 가입. 생활 소모품이나 콘텐츠를 비롯해, 생활 가전, 자동차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전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정말 많은 것이 구독 서비스로 변했다.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기에 이런 변화가 생긴 걸까. 이런 변화의 뒤에 있는 기술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앞으론 어떻게 변할까. 자, 이야기를 풀어보자.
여기서 말하는 ‘구독 서비스’란, ‘개인의 필요에 맞게, 돈을 내고 일정 기간 반복해서 서비스나 제품을 제공받는’ 것을 가리킨다. 예를 들어 놀이공원에 가려고 당일 입장권을 산다면, 그건 ‘구매’다. 하지만 1년 간 아무 때나 들어갈 수 있는 연간 이용권을 산다면, 그건 ‘구독’에 해당한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구매’지만, 스트리밍 동영상 서비스에 가입해 영화를 보는 것은 ‘구독’이다.
복잡한 듯 적었지만, 사실 쉽다. 사업 모델 측면에서 봤을 때, 구독형 또는 서브스크립션(Subscription) 모델 자체는 너무 흔해서 그렇다. 우리는 예전부터 신문이나 우유, 유산균 음료 등을 구독했다. 지금도 렌털 가전이란 이름으로 정수기 등을 구독하거나, 인터넷, 휴대폰을 구독해 쓰는 사람은 아주 많다. 다만 그걸 구독이라 부르지 않았을 뿐이다.
다른 나라에선 주로 서브스크립션 사업(Subscription business)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선 그냥 ‘서브스크립션’이라 부르거나 ‘서브스크립션 커머스’, ‘구독 서비스’라 부른다. 구독이라고 하면 헷갈리니 ‘가입형 서비스’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런 구독 서비스를 한데 모아 부르는 말이 ‘구독 경제(Subscription Economy)’다.
흔한 서비스를 새로운 것으로 만든 이는 미국 화장품 정기배송 서비스 ‘버치박스(www.birchbox.com)'다. 2010년 만들어진 이 회사에서는, 유명 브랜드의 화장품 샘플을 랜덤 하게 상자에 담아 매달 배송했다. 이 사업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이와 비슷한 서브스크립션 사업이 우후죽순 격으로 등장하게 된다.
여기에 더해 2011년, 애플 앱스토어에서 앱 내 구독 기능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이용자는, 매달 앱에 돈을 내면서 쓸 수 있게 됐다. 오프라인과 온라인 양쪽에서, 구독 서비스를 본격 지원하기 시작했다.
왜 하필 이때, 그러니까 2010년을 기점으로 구독 서비스가 뜬 걸까?
갑자기 뜬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인터넷과 스마트폰 보급이 큰 역할을 했다.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지역에 사는 다양한 사람에게 구독을 받을 수가 있고, 스마트폰을 통해 필요한 물건을 개인적으로 주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아이디어가 있어도, 그걸 실현할 물적 기반이 없으면 사업이 될 수 없다.
실제로 미국에서 서브스크립션이 뜨던 시기(2011년)는, 사람들이 휴대폰을 스마트폰으로 교체하던 시기와 겹친다. 한국에서 구독형 서비스가 뜨던 시기(2014년)는, 스마트폰 가입자가 4천만 명을 돌파하던 때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은, 콘텐츠 소비 및 상품 구매를 개인적인 경험으로 바꿨다.
예전 구독형 서비스는 ‘남이 권해서’ 가입하던 서비스였다면, 이 시기부터 ‘내가 택해서’ 가입하는 서비스로 바뀌게 된다. 무엇인가를 ‘소유’ 하지 못하는 대신, 풍부하게 ‘이용’할 수 있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그걸 골고루 맛볼 수 있다는 건 큰 매력이다.
초고속 인터넷 보급 이후, 콘텐츠를 스트리밍으로 전달할 수 있는 기술(Content Delivery Network, 이하 CDN)이 안착된 것도 영향을 끼쳤다. 90년대 후반부터 나타난 CDN은 9/11 테러 때 발생한 네트워크 트래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집중적인 투자가 이뤄졌다.
이후 세계적으로 4G(LTE) 이동통신이 보급되고, 스포티파이(2006)나 넷플릭스(2007)처럼 웹으로 전송되는 스트리밍 미디어가 각광을 받으면서, CDN은 세계 어디서나 언제든 디지털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발판이 됐다.
기업이나 앱 개발자 입장에서도 구독형 서비스는 꽤 매력적이다. 기존에는 제품을 팔면 1~2년 AS를 해주고 끝났다. 또는 ‘유지보수’를 추가 비용을 받고 팔았다. 반면 요즘 소프트웨어는 끝없는 개선을 요구한다.
당장 보안 문제가 생길 때마다 패치를 해야 하고, PC나 스마트폰 운영 체재(OS)가 업그레이드될 때마다 그에 맞춰 고쳐야 한다. 광고를 붙여서 수익을 얻지 않는 이상, 한번 비용을 받고 끝나기엔 추가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 그렇다고 판매한 제품에 유지 보수 비용을 따로 받을 수도 없다.
반면 구독형 모델은 지속적으로 수익이 생긴다. 지속적인 피드백을 통해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선할 수도 있다. 넷플릭스나 스포티파이가 아니어도, 사업을 유지할 정도의 수익이 생긴다면 계속 앱을 만들 수 있다. 물리적인 제품을 파는 입장에서도 유리하다. 고객 규모와 수익이 예측 가능하고, 예측 가능하니 재고 관리도 수월하고, 낭비도 막는다. 때론 고객의 얼굴을 직접 볼 수 있어서 좋다는 회사도 있다.
이렇게 각광받은 구독 서비스지만, 시간이 지나니 문제가 커졌다. 너무 많은 구독 서비스가 나오면서 비용이 높아지고, 과연 가치가 있는 구독인지 따지는 사람이 늘어갔다. 한 달은 무료지만 자동 연장됩니다~ 하는 마케팅으로 받는 피해도 꽤 많다.
사실 좋은 구독 서비스를 계속 유지하기는 절대 쉽지 않다. 이용자는 항상 좋은 경험, 내는 돈 보다 더 많은 가치를 원하고, 그게 없다고 생각하면 바로 떠나기 때문이다. 콘텐츠나 제품은 물이나 전기가 아니다. 다른 대안도 많고, 너무 많은 구독 서비스가 이용자에게 피곤함을 안겨 주기도 한다.
구독 서비스가 고객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치는, 크게 3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먼저 잘 알고 있을 상품 구독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구독하거나, 밀키트를 정기적으로 배송받거나, 면도기를 정기적으로 배송받는 등 다양한 상품을 취향에 맞춰 배송받을 수 있다.
두 번째는 서비스 구독이다. 동영상이나 프리미엄 콘텐츠,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가 여기에 속한다. 어도비나 MS 같은 곳에서 기간을 정해 프로그램을 쓸 수 있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최근에는 AI 기능 등을 부가 서비스로 함께 제공하기도 한다.
세 번째는 가치 구독(유료 멤버십)이다. 온라인 쇼핑몰에서 회원 가입한 사람에게만 배송을 빨리 해준다거나, 유튜브나 패트론, 위버스 같은 크리에이터 플랫폼에서 가입자 전용 콘텐츠를 따로 제공한다거나 하는 일을 말한다.
겉으로는 이 3가지이지만, 진짜 좋은 구독 서비스에 내재된 가치는 따로 있다. 바로, 콘텐츠나 상품 제공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끈끈하게 만들어 준다는 것이다.
반복해서 사용하고, 나에게 맞게 튜닝하고, 의견을 제공해 제품이 개선되는 과정에서, 이용자가 정을 붙인다고 해야 할까. 때론 아이돌 그룹 팬클럽처럼, 거기 가입자라는 것이 자기 정체성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요즘 많은 구독 서비스는 이 핵심 가치를 잃어버렸다. 이용자는 소유에서 벗어나 더 즐거운 경험을 위해 돈을 내고 싶은데, 그저 돈만 내는 호구가 되길 바라는 서비스나 앱, 제품이 너무 많다. 다른 가치를 더하지도 않으면서, 그저 유행 따라 구독 서비스에 바꾸는 서비스도 한둘이 아니다.
결국 이젠 '구독하세요'란 말만 나와도 진저리 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구독 요구가 오히려 악성 사업 모델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제는 다시, 구독 서비스 사업 모델을 진지하게 재검토해 볼 때가 됐다. 그게 아니라면, 싫어하는 사람들은 더 늘어나게 되고, 그에 따라 규제도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요즘 이용자들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다. 그들은 소비를 통해 경험을 하고, 경험을 가지고 새 콘텐츠를 만들길 원한다. 밥 한 끼를 먹어도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만들 수 있는 레스토랑을 간다. 여행을 가도 반짝반짝하게 유튜브 영상을 찍기 좋은 곳이 화제가 된다.
기타를 팔면서 ‘기타 강습’ 구독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처럼, 앞으론 경험을 통한 아웃풋을 제공하는 서비스가 관심받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 식의 새로운 경험을 주지 못한다면, 구독이 아니라 다른 사업 모델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