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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그니 Sep 12. 2016

남자, 처음 꽃을 배우다

내가 꽃을 만들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오래전, 장미꽃 100송이를 산 적이 있다. 좋아하고 있던 그녀와 첫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학생이던 때라 돈이 없었다. PC 통신에 누가 올려놓은 글을 보고, 새벽 고속 터미널 꽃 시장에 직접 꽃을 사러 갔다.

꽃을 고르는 눈은 없으니, 눈에 띄는 가게에 가서 물어봤다. 개인에겐 안 판다고 했다가 100송이라면 팔겠다고 했다. 어디에 쓸 거냐고 묻기에 왠지 부끄러워, 누나 결혼식에 줄 거라고 했다. 아저씨가 곱게 흰색 리본까지 달아주셨다. 

조금 민망했지만 곱게 받았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들 쳐다봤다. 새벽에 나오니 약속 시간까지 한참 시간이 남았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라 마냥 기다렸다. 몇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오지 않았다. 아직도 가끔 기억나는, 많이 쓸쓸했던 기억.



아는 형이 잠깐 보자고 해서 나갔다. 플라워 월드컵에서 우승한 선생님의 블로그를 만들려고 하는데, 조언을 좀 듣고 싶다고 한다. 플라워 월드컵(?)이란 것이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중에 검색을 해보니 '인터플로라 월드컵'이란 이름이 정식 명칭이고, 정말 세계 최고 권위의 대회였다. 

그 형의 계획을 듣는데,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꽃 작품 사진을 올려놓고 프로필 올려놓는다고 누가 와서 볼까? 그런 것 말고, 누가 꽃이라도 배우면서 그 배우는 과정을 적어 올리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냐고 했다. 꽃 선생님 시각 말고, 검색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원하는 정보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 형이 그런다.

그럼 니가 배워볼래?


그리고 그때의 내 표정은 이랬다.

님, 지금 뭐라고요???


농담이라 생각했는데, 한 달 후 전화가 왔다. 어디로 몇 시까지 배우러 오라고. 세상이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꽃을 배우게 됐다. 

먼저 재미있는 영상을 한 번 보고 가자. '인터 플로라 월드컵 2015' 관련 영상이다. 처음부터 '우승자는, 한국의 알렉스 초이!'라는 멘트가 튀어나온다. 영어 이름은 알렉스 최, 한국 이름은 최원창. 이 자리에서 선생님은 '아이 러브 유!'를 큰 소리로 외친다. ... 그 말 밖에 생각 안 났다고 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4HINqnQ6v7s


맞다. 나나 선생님이나 영어를 잘 못한다....-_-;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실력이 있으면 영어는 문제 되지 않는다. 우승 소감을 당당히 한국어로 얘기해도 된다. 지금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꽃을 만들고 있다. 플로리스트에 대한 인식이나 대접은 한국보다 다른 나라가 훨씬 더 낫다. 


꽃 강습이 진행된 곳, FLORIAT



문제는 ... 지금 그 쌤이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한 번도 꽃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꽃에 대한 슬픈 추억을 간직한, 꽃미남과 절대 거리가 먼 대한민국 표준체형을 가진 남자 앞에. 그런 남자에게 꽃을 가르쳐주기 위해. 


... 아까도 말했지만, 뭔가 세상이 잘못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아무도 내게 이럴 순 없어.... ㅜ_ㅜ

하지만 세상은 넓고, 모든 것은 내겐 어드벤처. (눈물을 머금고) 도전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이상하다. 첫 수업이니, 뭔가 되게 기초적인 것들, 가위질을 한다거나 꽃을 꽂는 기본적인 기술이라거나, 아니면 뭔가 이론적인, 그런 것을 배울 줄 알았다. 아니다. 처음부터 그냥 시작한다. 


결국 나는 이날, 꽃바구니(?)를 하나 만들어야만 했다. 


나는 만들기를 좋아한다. 뭔가를 잘 따라 하는 재주가 있다. 대신 선생님을 굉장히 가린다. 학창 시절부터, 어떤 쌤을 만나는가에 따라 시험 성적이 바뀌는 학생이었다. 최원창 쌤은 다행히 나와 잘 맞았다. 내가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해서 문제지.

쌤은 뭐랄까. 원리 중심으로 설명을 한다. 꽃을 꽃을 때는 가운데에 중심이 있다고 생각하고 꽂아야 한다. 땅이 있고, 풀이 있고, 거기에 꽃이 핀다. 꽃은 둥글고 조화롭게, 하지만 높낮이를 둬서 입체감이 있도록. 꽃을 어떻게 꽂느냐에 따라 꽃의 표정이 바뀌니, 동산 위에 해가 떠있다 생각해고 꽂아야 하고.

...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계속 이런 생각을 했다.

텔레토비 동산이잖아!


둥글고, 조화롭고, 꽃도 풀도 피어있고, 햇님도 있고... 아무튼 텔레토비 동산을 떠올리며 꽃을 꽂다 보니, 한 시간 후 이런 꽃꽂이가 만들어졌다.

보라돌이가 없다고 슬퍼하지 말자. 필터를 덮어씌우면서 찍은 사진이다 보니 보라색이 핑크빛으로 변한 탓이다.


최원창 쌤이 만든 작품과 비교하면 조화로움이 확실히 떨어진다.


만들어 놓고도 내가 놀랐다. 잘 만들어서 놀란 것이 아니라, 어찌어찌 꽂았는데 꽂고 나니 꽤 그럴듯해 보여서. 한 시간만에 이런 것을 만들었다니, 내심 속으로 뿌듯해했다. 10분 후 지나가던 아가씨가 던진 이 한마디에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지만. .


음, 처음치곤 이 정도면 뭐...


속으로 백만 번을 울었다.



꽃을 만드는 순서, 방법이 적힌 글이 필요한 사람들도 있을까? 모르겠다. 그동안 워낙 꽃을 접해보질 않았다. 사람들이 '꽃보다 현금'을 더 선호한다는 말도 들었고, 어버이 날에도 꽃 선물하는 사람들이 많이 줄은 지라, 거기까진 생각할 기회도 없었다. 필요한 사람이 있다면 따로 정리해서 올려둘 예정이다.

꽃 만들기는 생각보다 즐거웠다. 물론 모든 재료를 이미 쌤이 준비해줬고, 쌤이 만드는 것을 보고 따라 하면서, 궁금한 것은 질문하면서 만들었기에, 진짜 '내가 만든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나도 의문이다. 하지만 재미있었다. 

그렇게 만든 꽃은 줄 사람이 없어서 지금 곱게 내 방에 자리 잡고 있다. 하루에 조금씩 물을 주면서, 봉우리째 꽂았던 아이들이 꽃을 피우길 기다리는 중이다. 참 묘한 것이, 예전에 방에서 딸기 키울 때도 이런 기분이었지만, 방 안에 작은 자연이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그 작은 변화가, 은근히 좋다. 

앞으로도 몇 번 더 꽃을 배울 예정이다. 그 과정이 지나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줄 꽃 정도는 내가 만들어서 선물할 수 있을 것 같다. 밥은 못하지만 꽃은 만들 줄 안다. 내 인생에 남들이 못하는 재주 하나 정도는 가지고 있어도 좋지 않은가. 다만 슬픈 것은...

내 얼굴이 꽃바구니만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


사람이 꽃바구니를 받았으면 꽃에 파묻혀야 정상이지, 얼굴이랑 같이 놓으니 '꽃-눈사람' 같은 모습이 될 거라곤 생각을 못 해서 많이 슬펐다.  


오래전 그날, 그녀의 집으로 몇 번 전화를 했다. 아무도 받지 않았다. 대여섯 시간을 더 기다리다 카페를 나왔다. 나오기 전, 옆자리에 앉은 연인들에게 꽃을 주고 나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잘한 일이었다. 꽃을 선물 받은 연인들은, 그날 하루는 묘한 행운에 기분이 좋지 않았을까? 

세상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어야 더 예쁜 것들이, 있긴 있다. 다만 그땐, 그 사람이 내가 아니었을 뿐. 다음에 만들 꽃은, 집으로 가져오지 말고, 꼭, 누군가에게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꼭, 누군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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