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박완서

존엄하게 죽을 권리에 대하여

by 재숙

"저는 나중에 아프면 스위스로 갈래요."

제주 여행길에서 잠시 도반이 된 한 여행자는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말한다. 결혼을 할지 안 할지도 모르고, 그것과 상관없이도 나중에 불치의 병에 걸리면 스위스로 가 조용히, 고통스럽지 않게 생을 마감하고 싶다고. 아마도 많은 이들이 한 번쯤은 생각해 봤을 것이다.


이 책 <아주 오래된 농담>에서 재벌 3세인 송경호는 암 말기로 여명이 1년도 안 되는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송경호는 이 사실을 모른다. 송경호의 부모는 본인이 이 사실을 알면 충격을 받아 지레 삶을 포기할 것이라며 송경호의 아내에게 절대 비밀을 지킬 것을 명한다(나중에 이는 돈에 눈이 먼 가족들의 기획임이 드러남). 그리고 가족들은 단지 결핵이 좀 심할 뿐이라고 송경호를 위로하며 갖가지 보양식을 챙긴다. 송경호는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이 어떤 병에 걸렸는지, 여명이 어느 정도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무력하게 붙잡혀 가듯이 세상을 떠난다.


환자에 대한 병 및 진단 결과, 예후 등의 설명의무(의료법 제15조의 2)는 2017년 개정법으로 신설, 시행되고 있으며, '다만 환자의 정신적·신체적 상태와 가족의 의견을 고려해 적절한 시기와 방법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어쨌든 환자의 서면 동의 및 기록이 있어야 하므로 이제 위의 송경호와 같은 사례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책이 2000년도에 출간되었으니 당시에는 이러한 일이 비일비재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례가 등장한다. 치킨 박(치킨가게 사장)은 우연히 건강검진을 받았다가 암이 발견되는데 다행히 초기인 데다 수술하면 완치도 가능하다. 의사로부터 진단 결과 및 예후를 들은 치킨 박은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고 솔직하게 이야기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한다. 하지만 치킨 박은 며칠 뒤 병원 지하에서 유서와 함께 목멘 채로 발견된다. 그는 유서에 병 치료하느라 돈 없애고 남아 있는 가족들 힘들게 할까 봐 먼저 간다며, 이만하면 할 도리 다하고 간다고 칭찬해 주길 바란다고 마지막 말을 전한다.

사람의 생명이 초개 따위로 평가절하된 것 같아, 돈이 인간 존엄을 밟고 세상의 절대 가치로 우뚝 선 것 같아 혐오감이 들기도, 허무감이 들기도 한다.


여기에서 자연스레 환자의 알 권리에서 존엄사로 생각이 넘어간다. 얼마 전 폐섬유증 환자 60대 남성이 조력 자살을 위한 스위스행을 시도했으나 가족 신고로 경찰이 출국을 막았다는 기사를 보았다. 이 환자는 호흡 곤란 등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며 '고통 없는 죽음을 원했다'고 언론에 전했다. 존엄사는 크게 연명치료 중단(소극적 안락사)과 의사 조력 자살로 나뉘는데, 우리나라는 2016년 '연명의료결정법'으로 연명치료 중단이 합법화되었으나 조력 존엄사는 아직 법적 제한이 있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국민 82%가 조력 존엄사 합법화에 찬성하는 것으로 나타난 만큼 사회적 합의는 무르익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소설 속 송경호나 치킨 박의 사례처럼 돈에 얽힌 비자발적 선택, 혹은 자살의 남용 등 부작용에 대한 대비책과 함께 현실에 부응하는 법제화 마련만이 남았다고 할 수 있다. 위 A 씨의 사건을 계기로 웰다잉 확대 및 존엄사 논의가 촉발되었다고 하니 가시적인 성과로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본다.


"사람은 태어날 때는 모두 비슷하게 벌거벗고 순진무구하게 태어나지만, 죽을 때는 천태만상으로 제각기 다르게 죽는다. 착하게 살았다고 편하게 죽는 것도 아니고, 남한테 못할 노릇만 하며 살았다고 험하게 죽는 것도 아니다. 남한테 욕먹을 짓만 한 악명 높은 정치가가 편안하고 우아하게 죽기도 하고, 고매한 인격으로 추앙받던 종교인이 돼지처럼 꽥꽥거리며 죽기도 한다. 아무리 깔끔을 떨고 살아봤댔자 자식들한테 똥을 떡 주무르듯 하게 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안나 카레니나의 법칙이라고 할까.

존엄하게 죽을 권리가 더욱더 절실해진다.

우리에게 스위스행은 객사의 위험을 무릅쓴, 너무도 쓸쓸하고 고된 여정이다.

(이마저도 돈 없는 이들에겐 부러운 선택지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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