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너무나도 유명한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이다. 이 묘비명이야말로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불교에 심취했고 이 묘비명 또한 붓다와 목자의 대화에서 기원한다. 가짐으로써 자유로운 목자, 필요와 소유에의 집착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유로운 붓다. 이는 저자가 줄곧 고민해 온 화두이자 지향이다. 그리고 저자는 조르바에게서 붓다를 발견한다. 하지만 살아 있는 한, 살아가야 하는 한 저자가 말하는 '자유'를 오롯이 누리기란 불가능한 게 인간의 숙명이다. '자유'가 그의 묘비명에 적힌 이유이겠다. 우리는 자유로워지기 위해 끊임없이 부자유로운 노력을 할 뿐이다.
이 책의 주인공 조르바는 적극적으로 자유로운 삶을 구현한 인물이다. 그는 조국을 위해 숱하게 사람을 죽이고 돈벌이를 찾아 여기저기 헤매는 '부자유로운' 삶을 살지만 이제 그에게 인간은 그저 연민의 대상이며 일은 그가 생생하게 살아있음의 증명일 뿐 그를 자유로부터 구속하지 못한다.
조르바는 말한다. "좋은 사람이든 나쁜 놈이든 나는 그것들이 불쌍해요. 모두가 한가집니다. 사람만 보면 가슴이 뭉클해요. 오, 여기 또 하나 불쌍한 것이 있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많은 이들이 조르바의 여성 편력과 거친 표현을 비난하기도 하지만 사실 그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그는 여성을 포함해 모든 인간을 연민한다. 조르바의 자유는 연민, 외로움, 슬픔의 다름 아니다. 조르바는 죽음보다도 나이 듦을 두려워하는데, 인간의 노쇠와 함께 찾아오는 외로움, 무력감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리라.
자유! 듣기만 해도 가슴 뛰는 단어지만 결국 사람들은 자유 이면의 외로움 앞에서 덜 자유로울지언정 오르탕스 부인처럼 누군가의 곁에 정박하여 따뜻하게 사는 삶을 선택한다. 우리의 자유로운 영혼 조르바도 결국 류바라는 항구에 닻을 내리지 않았던가. 정박하여 '절대적인' 나만의 자유를 길어내며 사는 삶, 어쩌면 진정 자유에 가 닿는 삶일지 모르겠다.
사업을 망해버리고 크레타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 조르바와 저자는 양고기를 뜯으며 토끼피처럼 붉은 크레타 포도주를 마신다. 그리고 조르바는 말한다. "두목! 사람을 당신만큼 사랑해 본 적이 없어요. 하고 싶은 말이 쌓이고 쌓였지만 내 혀로는 안 돼요. 춤으로 보여 드리지. 자, 갑시다!" 그렇게 그들은 치레에 불과한 말을 걷어내고 크레타에서의 행복했던 순간들, 서로에 대한 애정, 그리고 이별의 아쉬움을 온몸으로 쏟아낸다.
누군가는 '조르바'를 두 번은 읽기 싫다고 한다. 나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하는 부러움과 현실의 벽에 자괴감이 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우리에게는 '조르바'가 더 필요하지 않을까. 현실과 타협할지언정 자유에의 추구를 멈추지 않고 식어 버린 가슴에 다시 불을 지필 수 있도록. 조르바의 자유로움에 더해 사람을 뜨겁게 사랑하고 연민할 줄 아는 그 가슴이 부럽다. 극단적으로 분열된 요즘, 각자도생이 일상이 된 시대에 사람 냄새나는 이 책이 좀 더 많이 읽히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