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는 짐승> 필립 로스

by 재숙

내 심장을 살라다오. 욕망에 병들고 죽어가는 짐승에 단단히 들러붙어 있어. 이 심장은 자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니.

-예이츠, <비잔티움으로 가는 배에 올라>

예이츠의 시에서 인용한 이 책의 제목 '죽어가는 짐승'은 늙어가면서도 성적 욕망은 절대 노쇠하지 않는 자신에 대한 작중 화자의 자조적 표현이자 넓게는 숙명적으로 죽음에 다가가고 있는 우리 인간을 표현한 말일 게다.

책은 70세의 노교수 데이비드가 지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1인칭 시점의 구술 형식을 취한다. 자기 분야에서 상당한 명성을 쌓은 데이비드는 성적 쾌락주의자로 젊은 시절부터 제자들과 자유롭게 관계를 맺는다. "몸에도 뇌만큼 삶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인용된 위 문구만큼 데이비드의 삶의 본질을 잘 표현해 내는 게 있을까 싶다.

62세의 데이비드는 자기보다 서른여덟 살이나 어린, 터질 듯한 성적 매력을 발산하는 제자 콘수엘라에게 빠져들고 그들은 원초적인 성적 쾌락에 탐닉한다. 특히 데이비드가. 하지만 데이비드는 콘수엘라와의 관계에 몰입할수록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에 커다란 고통을 느끼고, 성적 갈망은 점점 더해간다.

데이비드는 스스로 늙었다고 생각하고, 또 물리적으로 체감하면서도 노인에 대한 사회적 기대, 노인다움, 나잇값에 대해서는 거부 반응을 보인다. 도덕적으로 지탄받을지언정 금욕적인 노인, 점잔 빼는 무기력한 노인은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떤 것도, 어떤 것도 잠잠해지지 않는데, 이 사실을 내가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시간은 인간의 육체를 물리적으로 노화시키지만 여기에서 고통은 정신은 육체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늙는다는 것이다. 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또한 늙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한탄한다. "노년의 비극은 늙었다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여전히 젊다는 것에 있지." 정신은 청춘인데 육체는 노인인, 이 부조화를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데이비드는 정신을 따르는 삶을 살기로 한다. 그리고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포기하는 대신 고독할지언정 자유로운 삶을 선택한다.

우리는 '-다움' '-답게'라는 말을 무심코 쓰기도 하고 자주 듣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이 개인의 개성을 사회의 암묵적 합의의 틀에 가두려는 시도가 될 수 있음에 대해서는 그다지 숙고하지 않는다. 수많은 명사와 결합돼 그 명사의 수만큼 편견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이 표현은 개인으로서 자유로운 의지의 실현을 위축시키고, 나아가 죄책감마저 갖게 한다.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론>에서 인간의 자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우리가 타인의 행복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는 한, 또는 행복을 추구하는 타인의 노력을 방해하지 않는 한, 자유라고 부를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유는 우리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유다." 굳이 밀의 자유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와 같이 자유로움을 갈구하는 타인에 대해 좀 더 관대하고 따뜻해지기를 바라본다.

소식이 끊긴 지 3년 만에 콘수엘라가 데이비드를 찾아온다. 사실 데이비드의 정신적 교감이 배제된, 육체적 쾌락만의 탐닉이 불편하기도 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데이비드는 콘수엘라와 헤어지고 그녀를 매우 그리워한다. 그가 신봉하는 섹스 이외의 감정 없이 그 긴 시간을 그리움으로 보낼 수 있을까. 데이비드가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노년의 삶을 비관하던 그에게 유방암 판정을 받은 콘수엘라는 자신의 삶이 금방이라도 끝나버릴 수 있다며 불안을 토로한다. 데이비드도 그렇거니와 우리는 늘 망각한다. 삶이 시계열적으로 종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그 불확실성만큼 오늘의 삶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타인이 정해준 '-답게'에 맞춰 살기에는 우리네 삶이 그렇게 길지 않을지 모른다. 진정 '나다움'을 위한 용기를 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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