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내심(人內心): 피플러스- 3. 성우 서원석 이보희 부부
바야흐로 AI의 시대다.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한낱 기계 덩어리에 불과했던 여러 기기들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고 교류하게 되었다. 특히, ‘AI 스피커’라고 불리는 음성인식 디바이스는 친구이자 연인, 가족과 같은 존재로 등극했다.
그 중 ‘아리아’로 불리는 한 통신사의 음성인식 디바이스는 단순히 인간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넘어 감정적인 교감을 할 정도로 친근하다. ‘아리아’의 목소리 속에 감성과 생명력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성우 이보희. 그녀는 이 음성인식 서비스의 지향점과 가치를 잘 담아내기 위해 고심했고, 목소리 속에 따뜻함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가 ‘아리아’가 되기까지 고민하고, 힘들어할 때 옆에서 지지해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 있다. 선배 성우이자 배우자인 서원석이다. 목소리에 따뜻함과 촉촉한 감성을 담아 세상에 퍼뜨리고 있는 서원석 이보희 부부를 만났다.
성우가 되신 계기가 궁금해요.
이보희(이하 이): 연영과 출신인데, 졸업을 앞두고 진로에 대해 고민이 많았어요. 배우로서의 삶에 자신이 없었죠. 그러면서 내 장점이 무엇일까 살폈고 주위에서 목소리에 대한 장점을 이야기해서 성우가 되기로 마음먹었어요. 그렇게 뒤늦게 성우 준비를 했는데 잘 풀렸죠.
서원석(이하 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준비하는 성우들이 많은데 보희는 특이한 케이스였어요. 저는 고등학생 때부터 준비를 했죠. 작은아버지가 아나운서였는데 성우라는 직업에 대해 적극 추천해주셨어요. 아카데미에서 고교생은 잘 받아주지 않는데 저는 고교시절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대학교도 신방과 다니다 성우가 되기 위해 방송연예과에 재입학했죠.
이: 전 일찍 들어온 만큼 성우의 세계를 잘 몰랐어요. 그래서 성우가 된 이후 고생을 많이 했죠.
두 분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결혼 계기가 궁금합니다.
이: 대원방송 성우 2기에 지원해 시험을 보러 갔었는데 그 곳에 오빠(서원석)가 있었어요. 오빠는 1기로 입사해서 2기에 지원한 응시생들 안내를 돕고 있었죠. 눈빛을 봤는데 ‘아, 이 사람이다. 나와 잘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서: 선배도 후배도 없는 상황에서 첫 후배기수가 생기는 터라 동기들의 관심이 많았어요. 특히 이번 2기 응시생 중에 괜찮은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보희였죠. 저 역시 보희를 보자마자 비슷한 생각을 했어요. 저 사람 참 괜찮을 것 같다고.
이: 입사 후 작품 이야기 등을 하면서 친해졌고, 그렇게 비밀 연애를 시작했어요.
서: 선후배 성우 간의 분위기가 엄근진인 경우가 많아서 나름 둘이 모른 척하며 연기를 했어요. 그러다 2년 만에 들켰죠. ‘말’을 하는 직업이라 그런지 금새 소문이 퍼졌죠. 그러자 동료들이 얘기를 하더라고요. 네가 표정을 못 감추는 것 같았다고 말이죠.(웃음)
지금까지 몇 작품이나 하셨어요? 그리고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서: 저는 13년 차, 보희는 11년차다 보니 굉장히 많은 작품을 했어요. 애니메이션 게임 외화 더빙 등을 다 합치면 아마 수 백 편은 될 거예요. 배우들은 일 년에 한 두 작품을 하지만 저희들은 하루에도 몇 작품씩 참여하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기억에 남는 작품은 ‘핀과 제이크’의 레몬 백작 역이예요. 마니아 팬층도 두터웠고 캐릭터 자체가 워낙 ‘돌+아이’라 많이 기억해주시더라고요. ‘드래곤볼’ 피콜로도 오랫동안 해서 애착이 가요.
이: 전 ‘프리큐어’요. 성우 경력이 부족하다 보니 욕도 많이 먹었지만, 마지막 회 더빙 때에는 눈물이 날 정도로 정이 들었어요. 몬카트의 세나 공주도 기억에 남아요. 여리지만 독립적이고 의지가 강한 캐릭터였는데, 당시 번아웃이 와서 힘든 시기에 나를 일으켜 준 작품이라 더 애착이 가요.
같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데다, 결혼을 해서 서로의 사생활 영역에도 들어와 있어요. 좋은 점도 있고 좋지 않은 점도 있을 것 같은데요?
이: 전 너무 좋아요. 일적으로나 사적으로 교집합이 많아서인지 한 번 말문이 터지면 새벽 4시까지는 거뜬히 하죠. 사실 오랫동안 만나본 남자가 없었어요. 1년 넘게 만나면 ‘헤어질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오빠는 ‘이 남자와 결혼해야 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들게 한 사람이었어요. 결혼 후엔 두 사람의 관계가 많이 달라진다는데 결혼 3년차인데도 한결같아요. 무엇보다 번아웃으로 고민할 때 버팀목이 되어 준 사람이죠.
서: 저도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사랑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도 많았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들은 기우였죠. 주위에서 이제 결혼 3년차니 슬슬 본성(?)을 드러내라고 하는데, 이게 본성이에요. 같은 직업을 가졌다고, 서로의 비밀이 없다고 숨 막히는 것도 없어요.
일할 때 장르별로 차이가 많이 나나요? 내게 더 잘 맞는 분야가 있고 좀 더 힘든 분야가 있는지요?
서: 다양한 장르를 다 경험해봤는데 게임이 저와 잘 맞는 것 같아요. 게임 녹음할 때 집중도 더 잘되고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요.
이: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더빙은 입모양 연기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틀이 있지만 게임은 그렇지가 않아요. 캐릭터는 볼 수 있지만 영상 없이 진행하는 거라 아드레날린이 분비되는 것 같아요.
평소 목소리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목소리 유지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는 않나요?
이: 잘 때 마스크 끼고 자요. 미세먼지가 좋지 않은 날엔 더 신경 쓰기도 하고요. 늦은 시간까지 수다 떨고 술 마시고 놀고 싶기도 하지만 주의하죠. 일을 집중적으로 해야할 때는 일부러 친구들을 안 만나기도 해요. 지하철에서 콜록거리면 사람이 있으면 피하기도 하고요. 목이 재산이다 보니 가족 중에 감기 걸린 사람이 있으면 약속을 미뤄주시기도 해요.
서: 눈에 띄지 않아서 그렇지 성우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건 배우 얼굴에 큰 상처가 난 것과 다름없는 일이에요. 감기 걸린 사람 피하는 게 유별나보일지 몰라도 저희들에겐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에요. 일을 못하는 걸 떠나 일에 관련된 분들 스케줄을 다 꼬이게 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겨울엔 옷을 껴입으면서 히터를 각별히 더 조심하기도 해요.
평소 말투나 성우로서 말투는 많이 다를 것 같아요. 일상에서도 성우식(?) 말투나 화법을 구사한 적이 있나요?
서: 정작 저희는 의식을 잘 못해요. 배우자도 성우다 보니 더욱 그렇죠. 오히려 일반인들의 목소리나 말투에 더 관심이 가요. 그 속에서 참고하고 배울 점들도 있어서요.
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더빙할 때는 이런 동작에도 추임새 같은 걸 넣어줘야 해요. 그런데 일상 속에서 다른 사람 앞에서 의자를 당겨 앉으면서 저도 모르게 추임새를 넣은 적이 있어요.
요즘 AI 스피커 목소리 주인공, 일명 ‘아리아’로 화제를 모으고 있어요. 어떻게 참여하시게 된 건가요?
이: 오디션을 보고 샘플을 땄어요. 그런데 저 말고도 100명 넘는 목소리 샘플이 있어서 큰 기대는 안했는데 감사하게도 제가 발탁되었죠.
서: 과거 음성합성 개념은 있었지만 4차 산업혁명 이후 본격적으로 AI도 발전했고, 성우로서 새로운 영역을 개척한 것 같아 뿌듯해요. 그런 만큼 어떻게 해나갈 지 보희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어요. 특히 기계 목소리 속에 어떻게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 지 고민했죠.
이: 기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지만, 제 목소리를 듣고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특히 1인 가구, 고독한 사람들이 많은 만큼 그 분들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친구 같은 목소리를 들려드리기 위해 고민했어요. 그래서인지 정이 많이 가요. 때로는 못 알아듣더라도 이용자들이 아리아에게 화내지 않으셨으면 해요.(웃음)
‘성우의 위기’라는 말이 계속되고 있어요. 더빙 대신 자막이 대세인 시대입니다. 게다가 연예인이나 셀럽이 성우를 대신해서 내레이션을 해요.
서: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요즘 배우분들도 내레이션을 아주 잘 하세요. 그 분에게 배울 점도 분명 있고요. 자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하지 말고, 내가 먼저 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어요.
이: 이젠 직업의 경계는 없는 것 같아요. 성우도 마찬가지고요. 성우만이 할 수 있는 역할도 분명 있을 것이고, 성우들도 울타리를 넘어 다른 분야에 진출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앞으로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무엇인가요?
서: 성우로서 할 수 있는 일 이외에, 둘이 가지고 있는 좋은 면을 끄집어내고 싶어요. 그리고 그걸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요.
이: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요.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나눌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서원석 이보희 부부가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눈빛만 보고도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사람’이라는 그 말. 목소리에 선한 에너지를 담아내는 그들을 보니 막연하게 느껴지던 그 눈빛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세상 사람들의 귀를 쫑긋거리게 만드는 그들만의 아리아를 열창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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