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아침 풍경은 늘 같았다.
엄마는 주방에서 분주하고, 나는 주방 옆에 자리한 방에서 나와 아침 인사도 없이
그대로 화장실로 가서 씻고 나온다.
아침 시간은 늘 여유가 없다.
학교 갈 채비를 마치고 나면 항상 시간에 쫓긴다.
엄마가 "이거 먹고 가야지" 하면
나는 짜증 섞인 말투로 "엄마! 늦었잖아. 그러니깐 좀 일찍 깨워주지. " 하며
괜한 투정을 엄마에게 쏟아내고는 현관을 나선다.
엄마는 죄인도 아니면서 미안하다 하시며 맨발로 쫓아 나오신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 내 입에 뭔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넣어준다.
"이거라도 먹고 가. 배고파."
그거 하나 식탁에 앉아서 먹고 나오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그 아침 투정을 엄마에게 쏟아내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17세의 나를 도대체가 이해할 수 없고,
알 수가 없다.
나도 엄마의 아이로 태어나 성장하고 엄마가 되었다.
아이를 처음 낳았고, 아이를 처음 키우는 실수투성이 엄마다.
나도 내 아이가 어떤 성향의 아이인지, 무얼 좋아하는지, 뭘 알려줘야 할지
경험으로 학습으로 터득하고 있었다.
우리 엄마도 그랬을 것을 나는 엄마가 되고 난 뒤에 깨달았다.
'엄마를 부탁해'는 이 세상 모든 자녀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내 새끼는 엄마 존재의 이유다.
내 새끼는 엄마가 전부였다가 점차 엄마가 아닌 다른 것들이 눈에 들기 시작한다.
그러다 엄마를 점차 한쪽 곁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더 이상 엄마가 내 마음속의 일 번이 아니다.
엄마보다 더 좋은 것이 점차 늘어간다.
슬프지만 그것이 이치리라,
엄마를 잃어버렸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서울로 오던 엄마가 사라졌다.
흔적도 없이 엄마가 사라졌다.
서울에는 자녀가 넷이나 있다.
아들 둘, 딸 둘,
그런데도 엄마를 잃어버렸다.
엄마를 잃어버리는 경험은 처음이라, 다들 당황한다.
혼돈의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몇 개월이 지나고 나니 점차 익숙해진다.
엄마의 부재가 슬프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다들 일상을 찾아간다.
여전히 엄마의 행방은 알지 못한다.
4장으로 구성되어, 각 장마다 주인공이 각기 다르다.
큰딸의 시점에서, 오빠의 시점에서 여동생의 시점에서 아버지의 시점에서 엄마의 시점, 다시 큰딸의 시점으로 마무리된다
다들 엄마를 추억하며 더 잘해주지 못해 후회하고 아쉬워한다.
엄마는 당연 존재였다.
엄마는 항상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엄마는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는 사람이었다.
엄마의 시점으로 마무리되는 장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엄마는 영혼이 되었는지 자식들과 남편을 둘러보고,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삶을 마무리하고 정리하고 있었다.
소설 속의 엄마의 행방은 알지 못했지만 엄마의 삶이 정리되고, 엄마가 세상을 떠날 준비가 잘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엄마의 두통이 말도 안 되게 심했다.
글을 몰랐던 엄마는 봉사자의 입을 통해 큰 딸의 책을 읽고 있었고,
자식들 몰래 마음으로 의지하던 사내도 있었고,
자식들에게 숨겼지만 일찍이 세상을 떠난 자식도 하나 더 있었다.
엄마는 비밀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저 다들 알지 못했다.
숨긴 거라기보다는 다들 그러려니 하고 엄마를 그냥 둔 것이 아니었을까
엄마를 사랑하지만 깊은 관심을 두지 못했다.
비단 소설의 주인공들에게서만 이루어지는 상황이 아닐 테다.
지금 나도, 다르지 않았다.
내 새끼들이 무얼 좋아하는지는 속속들이 꿰고 있으면서도
정작 엄마가 무얼 좋아하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엄마는 당연한 존재라고 생각하면서도
엄마에게 짜증을 퍼붓는 못난 딸이다.
엄마, 하고 소리 내 부르면 목 끝까지 차오름을 느낀다.
견디기 힘든 불안감이 와도 엄마를 찾으면 엄마를 만나면 나는 비로소 안정된다.
어린 시절 귀에 염증이 가득 차 한 번씩 고열로 인해 귀의 통증이 심했었다. 아프다 소리를 내지도 못해
이불속에서 끙끙 거리는 나를 발견하고 내가 다시 잠이 들 때까지 밤을 새워서 나를 보듬어 주던 그 손길은 엄마였다.
엄마의 따뜻한 손으로 나를 쓰다듬어 주었고, 엄마의 섬세한 손길로 내 머리칼을 넘겨주면 아픈 귀가 낫는 느낌이었다.
내 엄마다.
내 엄마의 따스함이다.
나는 엄마의 딸이다.
나는 엄마의 첫째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