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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쉬는솜사탕 Dec 20. 2022

내가 걸었던 결혼의 조건

솔직히 말해서, 결혼을 결심한 건 '홧김에'였다.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내 나이는 결혼 적령기를 유유히 지나가고 있었다. 12년 동안 함께했던 남자 친구가 있었지만, 결혼을 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왜 해야 해?'라는 의문이 더 오랫동안,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결혼이란, 단순히 남자와 한 집에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관문을 통과하는 순간,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이 함께 묶인 올인원 홈쇼핑 패키지가 배송될 터였다. 나는 결혼과 함께 여성에게 부여되는 모든 의무와 책임을 떠안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당시 나는 치과 교정과 수련이 끝나갈 무렵이었고, 남자 친구는 대학원생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딱서니 없던 남친은 결혼을 하자며 수시로 졸라댔다. 그넘(?)은 모아둔 돈도 없었고, 학비는 장학금으로, 생활비는 부모님으로부터 보조받아서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코웃음을 쳤다. "뭔 돈으로 결혼을 해!!" 그 말에 남편은 결혼하는데 큰돈이 들지 않는다고(?) 했다. 당분간은 지금 사는 것처럼 따로 살면서, 졸업할 때까지 남은 1년 동안은 주말부부로 살면 된다고 했다.



어렴풋이 생각은 하고 있었다. 내가 만약에 결혼이라는 것을 한다면, 이 남자랑 할 것이라고. 그러나 굳이 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지금 충분히 안정되고 재미있게 지내고 있는걸? 아이를 꼭 낳아야 한다는 생각도 없는걸? 누구보다 이런 나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남친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얘기를 꺼냈다. 그 사이 종잇장 같은 귀를 가진 나는 세뇌되고 있었다. 결혼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지! 하지.. 한가?.. 아닌가?... 하지 않다... 필요 없다. 없다...



그러나 '결혼 = 거대한 덫'이라는 공식은 나의 뇌세포 하나하나에 아로새겨져 있었다. 돈이 필요 없어도 안 해!!! 그런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남자 친구의 구원군이 나타났다. 2011년이 며칠 남지 않았던 어느 날, 나는 엄마와 큰 싸움을 벌였다. 여러 가지 가정사가 겹쳐져서 폭발한 것이었다.



그날, 부모님의 그늘에서 벗어나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했고, 그 방법으로 결혼을 떠올렸다. 독립적인 가정을 꾸리면 물리적, 감정적으로 집과 분리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복잡한 집안 문제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줄곧 남자 친구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엄마에 대한 반항이기도 했다.



"결혼하자! 최대한 빨리. 대신, 네가 다 알아봐."

다음날, 남자 친구에게 말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결혼이 하고 싶던 남자 친구는 얼씨구나 결혼식장부터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따질 것도 없이 3개월 후로 식장을 잡았다. 각자 살던 집에서 계속 사는 것이므로, 별다른 준비가 필요하지도 않았다. 예물, 예단, 혼수 등 잡다한 것들은 모두 생략했다.



단, 신혼여행은 포기할 수 없었다. 남자 친구의 방학기간을 이용하면 시간을 여유 있게 낼 수 있을 터였다. 마침 나도 병원을 옮기는 시기여서 공백이 있었기에 조금 긴 일정을 계획했다. 결혼식을 하기 전, 신혼여행을 먼저 다녀오기로 했다.



그때는 결혼 후에도 휴양지에는 언제든지 다녀올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흑흑. 그때 몰디브를 가봤어야 했는데...) 길게 시간이 있을 때, 젊을 때, 배낭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스페인, 포르투갈로 2주간 신혼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2월이므로, 유럽에서도 그나마 따뜻한 동네로 가는 것이 다니기에 수월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후울쩍. 엄마의 속상한 마음은 외면하고 스페인으로 떠났다. 많이 걷고, 많이 헤맸지만 서로를 의지할 수 있었으므로, 힘든 줄도 몰랐다. 호텔 앞의 작은 카페에서 스페인식 아침을 먹고, 바르셀로나 파밀리아 대성당 앞에서 긴 줄을 기다리고, 밤에는 낯선 도시의 골목에서 흘러나오는 이국적인 음악에 귀 기울였다. 둘이 함께 만들어갈 미래가 열렸다는 사실이 연애할 때와는 다른 설렘을 불러일으켰다. 하루 종일 웃고 떠들며, 이제는 두 사람이 더욱 깊숙하게 연결되었다는 감각을 즐겼다.



긴 여행에 예산이 넉넉하지 않았으므로, 좋은 호텔을 이용할 수는 없었다. 대부분은 합리적인 가격의 숙소들이었다. 단 한 곳, 네르하라는 지중해 연안의 작은 도시를 제외하고는. 네르하는 '유럽의 발코니'라고 불린다고 했다. 그곳에서만은 기분을 내고 싶어서 바다가 보이는 괜찮은 호텔을 예약했다.



신혼여행의 클라이맥스일지도 모를 네르하에 도착했다. 비교적 따뜻한 지역이긴 했지만, 겨울의 바닷바람은 아직 날카로운 냉기를 품고 있었다. 관광객이 거의 찾지 않는 2월의 해안가에는 썰렁함마저 감돌았지만, 온화한 햇살만은 이곳이 지중해의 마을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해 질 무렵, 우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석양과 바다의 빛깔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겹겹이 부서지는 파도 소리를 배경 삼아 남자 친구는 소박한 프러포즈를 했다. 다이아몬드 반지는 없었고, 무릎을 꿇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내가 도망가지 않을 만한, 요란하지 않은 진심이 담긴 고백이었다.



그때, 나는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남편이 될 사람이 이것 하나만큼은 평생 지키겠다고 약속해 주기를 바랐다. 결혼은 꽃길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도망치듯 그 길을 선택한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강력한 주문이 필요했다.



"이거 하나만 약속해 줘.

내가 앞으로도 평생,

나답게 살 수 있게 해 줄래?"



그는 꼭 그렇게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 순간에 어떻게 아니, 혹은 글쎄...라고 대답할 수 있겠는가!)

사실, 대답을 듣던 당시에도 그 약속이 지켜질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지중해 바다 위로 부스러져버릴 말 한마디에 평생을 기댈 수는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앞으로 닥칠 큰 변화 앞에서 대답을 받아두고 싶었다. 아내, 딸, 며느리, 엄마로서가 아닌 '나의 삶'을 지키고 싶었다.




결혼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맙게도 남편은 그 약속을 지켜주고 있다. (물론, '그거 다 구라였어!!!'를 외치고 싶었던 순간도 있었다)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을 때에도 남편이 나를 온전히 이해하며,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큰 힘이 되어주었다.



'홧김에' 한 것치고는 꽤 괜찮은 결정이었다.

물론 계속 살아봐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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