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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쉬는솜사탕 Nov 30. 2023

또 다른 나?? 그런 거 없어~~

<책 여행>을 시작합니다.

한창 여행 책들을 즐겨 읽을 때가 있었다. 20대 무렵, 소설도 다른 에세이도 아닌 여행기들에 끌렸다. 초점이 흔들린 듯, 필터가 입혀진 듯 흐릿한 사진들과 쓸쓸함을 품은 문장들. 그것들이 나의 꿈인 양 쓰다듬었다.  


한비야, 오소희, 김남희, 이병률… 낯선 풍광, 피부와 언어가 다른 사람들 속을 누비던 사람들. 그들의 두둑한 배낭이 싣고 있는 자유와 용기가 부러웠다. 더불어 언젠가 나에게도  바람처럼 가볍게 세상을 누빌 날이 올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은 그럴만한 상황이 아니지만, 언젠가는.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지금은 여행기를 전혀 읽지 않는다. 도서관에 가면 오래도록 서성이곤 했던 여행책 코너 쪽도 발을 끊은 지 오래다. 아마도… 나이가 들고 현실과 타협하며, 나에게는 영영 그런 삶이 허락되지 않는다는 걸 깨우쳤기 때문인 듯하다. 아니 여행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일 그만두고, 적금 깨서 가면 되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리 단순한 문제는 아니다.




지금보다 어렸을 때, 운이 좋게도 일의 마디가 끊어지는 시기들이 있었다. 그때마다 짐을 쌌다. 배낭 하나를 벗 삼아 미지의 땅으로 떠났다. 그 작가들처럼. 예상치 못했던 작은 사건들, 혼자이기에 더욱 풍성하게 만나게 될 인연들, 일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말랑말랑한 영감들을 만나리라는 기대에 부풀었다. 그곳에서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며,  여행을 기점으로 내 인생의 방향 또한 완전히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 여행은 그런 거라고 했으니까.  


그런데, 꽤 많은 용기와, 시간과, 비용을 들여서 도착한 곳에는 내가 생각했던 ‘이야기’가 없었다. 내가 읽은 여행기들에서는 따뜻하고, 감동적이며 때로는 무섭고, 불쾌한 일들이 가득했다. 그런데 나의 여행은… 그냥 그랬다. 별 거 없었다. 물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도 했고, 자잘한 에피소드들은 있었지만, 대단치 않은 것들이었다. 책으로 묶어서 낼 만한 깨달음도, 감동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냥 유명 관광지들 사이를 건너 다녔다. 사람들 뒤로 길고 긴 줄을 서야 했고, 혹시나 소매치기를 당하지나 않을까 가방을 꼭 쥐었다.



‘왜 나의 여행은 그들처럼 빛나질 않는 거지?‘

‘또 다른 나?? 잘 모르겠는데…??’

‘나는 여행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인가?’


 큰 기대는 번뇌로 이어졌다. 그렇게 몇 번의 자유를 씁쓸하게 보낸 후, 여행은 내 삶에서 멀어졌다. 여행기도, 책도.




다시 책을 잡은 건, 2년 전에 일을 그만두면서부터다. 일을 하지 않으니 뭐라도 해야 하는데 마냥 놀기에는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있으면, 그 시간은 허비하지 않는 것처럼,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와 비슷한 이유로 글쓰기도 시작했다.


읽고 쓰는 게 일상에서 큰 부분으로 자리하면서, 또 다른 즐거움이 따라붙었다. 바로 ’ 남의 서재를 옅보는 것‘. 책이 많은 공간이라면 어디든 좋았다. 도서관일 때가 많지만, 북카페나 독립서점, 북스테이 같은 곳들도 찾아다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다 비슷하지 않을까. 빼곡히 꽂힌 책들을 보면서 ‘여기 있는 책 중에 천 분의 일이라도 읽어볼 수 있을까....’ 막막하다가도, 평생을 가도 읽을 책들은 널려있을 거라는 사실에 설렜다. 서가를 거닐고, 나와 닮았거나 완전히 다른 주인장의 취향을 옅보며, 우연히 마주친 보석 같은 책에 두근거렸다. 가슴속에 잔잔한 파동이 일어나며 무뎌진 감각들이 깨어났다.  




이런 시간에 매혹된 나는 다시 떠날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다시 시작됐다. 이번에는 배낭여행이 아니라 ‘책여행’.. 시간이 나면 책 두어 권과 태블릿을 챙겨서 발길을 옮겼다. 짧게는 동네 서점 탐방, 길게는 2박 3일 원정이었다. 머지않아 알 수 있었다. 그게 나에게는 가장 편안하고 행복한 형태의 여행이라는 걸. 비록 어린 시절 꿈꾸었던 세계를 누비는 배낭여행은 아니지만, 스펙터클 하고 다이내믹하진 않지만. 일상이 아닌 낯선 풍경 속에 서고 싶은, 겁 많고 소심한 이의 일탈로는 꽤 적당했다.



이제, 새로운 여행을 꿈꾼다. 우연히 들어선 골목에서 마주친 귀여운 커피잔, 추위마저 녹여줄 듯한 뜨끈한 밥 냄새, 주인장이 오래전에 그어둔 밑줄들을 만나는 여행. 그곳에서 피어나는 사유의 꼬리, 떠오르는 문장들을 잡아 꼼지락꼼지락 옮기고 싶다.


또 한 권의 여행기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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