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 에세이,『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박서원과 이연주와 나혜석과 전혜린, 그리고 이름 없이 죽어간 ‘그 밖의’ 이름들. 죽어서야 발굴되는, 죽어서조차 발굴되지 못하는 수많은 이름들. 발견되지 못한 채로 묻히고 죽어갔던 숱한 여성들을 떠올린다. 비단 시인이나 예술가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제 시대가 그들을 불러내고 있는 듯하다. 슬픔과 분노로 단단해진 여성들의 목소리가 그들을 호명해내고 있다. 전혜린은 그의 죽음이 불러일으킨 반향에 초점을 맞춰 문화적 기호로 사유 되었지만, 유학파 여성의 지적 편력이 일으킨 파장으로 인해 변화한 오늘날 대중의 독서 취향과 여성 지식인, 그들의 삶을 읽어내는 단초가 되는 작가이기도 하다. ‘어머니’, ‘모성’을 그리는 작품에서 대개 나타나는 여성성을 삭제한 보편의 맹점만큼이나 특수화된 여성성의 게토화를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주지할 때, 더 다양한 작품을 페미니즘의 시선으로 읽어야 할 필요를 느낀다. 이때, 전혜린의 작품을 여성 서사에 대한 더 다양한 논의 속에서 읽으며 비평의 장으로 호출한다면 어떨까.
전혜린 : 생의 한 가운데 서 있던 여성 문인의 목소리
논리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는 질문을 던지면 자연스레 나는 언어를 떠올린다. 논리는 언어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말을 배우면서, 말의 순서를 배우면서, 흰 바탕에 검은 자국에 불과할 어떤 사회적 기호의 인과를 배우면서 ‘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인지하고 배워간다. 그렇다면 이 논리는 권력을 가진, 헤게모니를 쥔 사람들의 언어에 기반할 것이다. 교육은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강자의 논리를 주입한다. 그리고 우리는 사실 강자의 논리에 편입되기 위해서 교육을 수용한다. 그들의 질서에 들어가기 위해 강자의 언어를 배우고, 강자의 논리를 습득한다. 사회적 약자인 소수자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계속해서 설명하기를 요구받는다. 언어와 논리의 주체인 누군가는 하지 않아도 되는, 자신의 존재가 합당하다고 논리적으로 설명하기를 요구받는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논리가 필요하지 않은 자명한 사실인데, 우리는 논리에 맞춰 우리를 설명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위치가 그러했다. 남성은 여성에 대해 낙인을 찍으며 타자로 밀어내왔다. 그리고 이 여성들은 이러한 낙인을 내면화하거나, 이에 저항하기 위해 또 어떤 말들을 남겨왔다. 그리고 그 말은 여성일수록 논리적이기를 요구받았다.
“여성은 개인적으로라도 무서운 고독과 절망과 싸우면서 자아를 쫓는 길을 걸어가지 않을 수 없으며 현재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이 숨은 곳에 많으리라고 확신한다. (중략) 우리는 여성의 결점을 열거하는 것보다도 우선 우리 존재의 문제를 좀 더 밝혀야 한다고 생각한다.”(185)
그런 요구가 여성이 처한 일반적인 삶의 한계에서 연유한다면, 그 한계를 논리적으로 ‘정치화’함으로써 사적 영역에 있던 목소리를 공적 영역에서 터뜨리는 것이 여성의 삶을 더 적극적으로 사는 전혜린의 방법이었을지 모르겠다. 우리 존재의 문제를 더 밝혀야 한다는 그의 말로부터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문단에서의 전혜린의 위치를 살펴보면, 전혜린 같은 비범한 지식인 여성은 쉽게 수용되지 않았으며, 소위 ‘여류 문단’도 보수적인 전후 문단을 따르는 중산층 여성 작가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독일 유학을 했던 지식인 여성을 향한 대중의 선망과 질투, 연민과 위안 속에서 전혜린은 여류 문인이 겪은 호기심과 조롱, 모욕적인 숭배를 모두 경험한 인물이기도 하다. 여성 문인은 논리를 요구받으면서도 논리에 입각한 그 발화조차도 쉽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전혜린의 작품을 읽음에 있어 작동하는 젠더적 편견, 더불어 읽고 쓰는 여성들에 대한 경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현재도 문제가 되는 문단 권력에 대해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리고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또 주목할 만한 점은,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와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 갖는 성장 소설적 성격이 묻어난다는 것이다. 당시 전혜린의 유고집이 이화여대를 비롯한 문학소녀들에게 특히 많이 읽혔다는 점, 그리고 1980년대까지도 전혜린의 글을 모방하는 청소년들이 많았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유년시절과 유학 시절 이야기, 그리고 결혼, 출산과 육아에 이르기까지 전혜린의 자아와 문제의식은 점차 성장하고 그 몸피를 키워간다. “남녀를 막론하고 인간이라는 무서운 조건 하에 있는 우리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우리의 삶을 규명하는 것일 것이며 적어도 그러한 근본적인 생, 감정에 지배된 생활이어야 한다. (중략) 무엇보다도 자기를 좀 더 응시할 수 있는 것, 자기를 견딜 수 있는 것이 결과적으로는 다 비극인 우리의 생의 소상을 긴박하고 팽팽하게 차 있는 참된 순간으로 지속시키는 방법일 것이다.”(180-181) 라는 문장에서도 드러나듯, 여러 모순적인 상황 속에서도 전혜린은 자신의 생을 직시하는 삶을, 단단함을 획득해나갔음을 알 수 있다. 혼란과 불안을 가감 없이 담아내는 과정에서 그의 내면은 성장을 거듭했을 것이다. 니나라는 여인 초상이 린저의 말을 대신했듯,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를 통해 전혜린의 목소리는 계속해 우리에게 전달되어 오고, 어떤 동일한 문제의식을 공유하게끔 한다. 그것이 그녀의 부모에 대한 체험으로 축적된 복합적 내적 갈등이건, ‘어머니’로 존재함으로써 때때로 느끼는 깊은 회의건, 동시대의 여성의 삶을 바라보는 시각이건, 생의 한 가운데서 보내는 그보다 더 솔직하고 직선적인 목소리는 없을 것이다.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전혜린을 읽는다는 것
여성 문학이 무엇이냐, 페미니즘 문학이 무엇이냐는 물음은, 그것이 무엇이어야 하냐는 물음과 등치되기 쉽고 곧 ‘여성 문학이란 어떤 것’이라는 답변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태도를 비평의 방법론으로 가져간다는 것은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로지 ‘무엇’이 골자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말할 것이냐는 태도가 논의의 진전을 발생시키고 지속시키는 것이라면 어떨까. 확장을 위한 정의 내리기가 페미니즘이 직면한 피할 수 없는 역설의 일면이면서도 이 역설을 해소하려는 시도가 페미니즘을 진전시키는 힘이라는 데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아기의 분만을 계기로 나의 모든 생활 방식이 달라졌고 인생관도 많은 변화를 겪었던 것이다. 내 딸의 출산은 나에게 절대적인 생활의 규율화를 명했다. 나는 언제나 그 아이와 같이 깨고 같이 자야만 했다.(후략)” (173)
“이렇게 비본질적 존재로 여성을 만든 것은 여성의 지눙 계수도 생리도 아니고 다만 사회의 상황인 것으로 사회와 가정은 여성을 가능한 한 비본질적으로 교육하기에 전력을 다해 왔다.”(183)
“내가 정화에게 품은 감정도 모성애라기보다는 면밀한 호기심과 관찰 의욕과 감탄이라고 부르는 편이 낫겠다. 아니 나도 도대체 모성애가 무엇인지 모르겠다.”(289)
전혜린의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를 논함에 있어 여성의 삶에 대한 통찰, 페미니즘적 성격을 발견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결혼 생활 속에 익숙해지고 모성애에 확신을 느끼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불안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며,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여성의 물질에 대한 애착 이면에 있는 어둡고 심각한 근원, 남성 중심적 근대 사회에 의해 억압된 여성의 자아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하기도 한다. 당대 남성 권력의 많은 얼굴이 만든 기억과 경험의 의미망을 흔들 만한 질문들. 권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무력(無力)이 있고, 무력과 무력의 감(感)은 과거 쓰는 여성의 생존과 존재와 잔존에 슬프게 새겨졌다. 그 무력의 감은 지금 우리와도 얼마나 친밀한가. 전혜린을 비롯한 여성 문인들이 그 무력의 감을 슬픔의 제도로 구축한 최초의 사람들은 아니었겠지만, 우리는 그 제도 안에 자리를 잡고 단단한 질문들을 조립해갈 수 있다. 가령, “현재 여자가 가정 밖에서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는, 전력을 다해야 하는 직업과 어린아이의 양육을 양립시킬 수 없는 것은 아직도 너무나 사회의 설비나 그 밖의 노력과 연구가 등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략) 앞으로 ‘직장을 가진 어머니’가 격증할 것이며 그에 따른 어떤 선처가 있을 것이 기대된다.”(309) 는 전혜린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으며, 유효한 문제의식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는 해당 작품을 현대의 페미니즘 비평의 장안에서 활발하게 해석하고 읽어야 할 이유가 되고도 충분하다.
페미니즘 역시 일종의 담론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기여하는 것은 단지 ‘무엇’에 해당하는 작품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즘 문학이라 이름을 붙인다거나, 그렇게 이름 붙은 작품을 선별한다거나, 선별된 것에 페미니즘적 해석을 가하는 작업 역시 중요하며, 그것은 그 모든 것을 어떻게 '의미화'하는가의 방법적 태도의 문제처럼 보인다. 작품이 실제로 어떻게 쓰였느냐, 읽히느냐는 차원과 더불어 그것을 ‘어떻게 읽어내고 있느냐’는 질문은 경계를 공고하게 만들기도, 경계를 확장하거나 무너뜨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므로 페미니즘의 접근 방식, 태도로서 경계의 문학을 탐색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전혜린의 작품 또한 그렇다. 역사인 적 없었던 우리 앞에 숱하게 던져진 역사의 종언 때문에, 어쩌면 덕분에, 우리는 멋대로 미래로 또 과거로도 갈 수 있다.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이전의 작품들을 다시 읽는다는 것, 이는 “그것을 의식할 때 우리는 생이 진정한 것이 아니었고 불성실한 것이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보다 한 발자국 나와 가까워진다. 자아에 대해서 비로소 눈이 뜬 느낌이 들게 된다.”(184)라는 전혜린의 말과 궤를 같이한다. 특정 시대의, 특정 권력의 문학이 명명하지 않은 빈자리, 배제되고 소외된 이름들, 욕망, 슬픔이 이제야 언어를 얻게 됨에 따라 어떤 삶과 목소리들이 새로이 발견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
참고문헌
<기본서>
전혜린,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민서출판, 2002.
<참고논저>
김용언, 『문학소녀:전혜린, 그리고 읽고 쓰는 여자들을 위한 변호』, 반비, 2017.
송경란, 「전혜린론-전후 지식인 여성에 관한 담론화 양상」, 『한국어와 문화』 제23집,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