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을 구하는 여정

헤르만 헤세, 『데미안』

by 수아


2020년 4월의 마지막 주 트위터를 뜨겁게 달궜던 키워드 중 하나는 ‘지적 허영’이다. 논쟁의 출발이 된 글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데미안을 100번 읽는 것보다 주식 서적을 한 권 읽는 게 더 도움이 된다.’ 예컨대 문학과 같은 인문 서적은 개인적인 성찰에 도움이 될지 모르나 생존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책으로, 최근의 독서 경향은 지적 허영에 가깝다는 논조로 작성된 글이다. 이에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온다. 동조하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독서로 간접 체험과 지식을 쌓는 건 교양의 일부이지 오히려 그것을 깎아내릴 때 지적 허영이 시작되는 것이라는 의견과 독서를 통해 취미, 취향, 미감에 대한 감각이 쌓여 교양이 되는 것이라는 비판적인 의견들도 있었다. 이와 같은 논쟁은 헤세의 『페터 카멘친트』중 한 단락을 떠올리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고와 정열의 모든 에너지를 사회나 국가, 학문과 예술 그리고 교육 방법의 상태나 설비에 기울인다고 나는 여겼다. 그러나 아주 적은 사람들은 외적인 목적 없이, 자기 자신을 쌓아 올리고, 시간과 영원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관계를 밝히려는 욕구를 아는 것으로 내게 여겨졌다.” 『데미안』과 주식 서적. 두 책의 가치와 무게는 읽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데미안』을 읽는 시간이 적어도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는 여정 정도의 가치는 지닌다는 생각이다.





『데미안』으로부터 구하는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


『데미안』을 읽고 나면, 이 작품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작품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답변 등을 한두 단계 정도로 구호화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헤세 작품 통찰의 중심에 있는 이른바 ‘내면성’은 무엇이고, 그 현실적 정합성은 어떠하며, 작품으로부터 오늘날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의미가 있는가? 와 같은 물음들 역시 따라온다. 가령 세 가지로 정리해보자면 첫째, 인간 각자의 삶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둘째, 삶 혹은 세계는 어떤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셋째, 나는 이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으며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 와 같은 질문들이 그 예이다. 작품 전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메시지임은 알 수 있지만, 보다 구체화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헤세가 제기한 문제의식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고, 작품으로부터 찾은 삶의 가치를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사회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 외부와 내면이라는 경계에 놓인 우리가 작품을 향해 질문을 던지고, 또 작품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해보는 일이 방향 상실의 키가 되어 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찾는 자이고, 아직도 그렇다. 그러나 나는 별을 쳐다보거나 책 속에서 찾지 않는다. 나는 나의 피가 내 속에서 소리 내는 그 가르침을 듣기 시작한다. 나의 이야기는 편치 않고, 지어낸 이야기처럼 달콤하거나 조화롭지 않다. 그것은 자신을 더 이상 기만하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들의 삶처럼 어리석음과 혼란, 광기와 꿈의 냄새가 난다.”(8~9)


줄거리는 차치하고서라도 작품을 읽으며 들었던 세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순서대로 구해보자면, 우선 헤세가 말하는 ‘나’는 ‘나’이지만 “어리석음과 혼란, 광기와 꿈”의 냄새를 한 존재로, 모든 인간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특별하고도 쉽게 정의되지 않는 불명료한 존재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치 지어낸 이야기처럼 나의 이야기가 조화롭지 않은 이유는 여기에 살아 있는 우리는 어떤 가공적이고 허구적인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며 때로는 편치 않은 이야기를 해야 하고, 자신을 더 이상 기만하지 않기 위해 앞으로 혼란 속에서도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역설한다. 계속해서 내적 갈등을 겪고, 시행착오 속에서 흔들리는 주인공 싱클레어의 모습은 이를 충실히 나타내고 있다. 작품은 이렇게 시행착오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뿐만 아니라 세계의 구성에 대한 고민 또한 담아내고 있다. 좌충우돌의 착잡한 과정에서 주인공 싱클레어 겪는 사건들은 이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고, 그 세계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자기 삶을 꾸려 나가는가를 보여준다. 크로머의 괴롭힘이나 소녀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 친구 데미안과의 만남,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와의 대화와 같은 이야기의 줄기들을 통해 우리 삶과 세계가 밝음과 어둠의 경계로 구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것을 존중하고 성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나는 생각해. 인위적으로 나뉘어진 공식적인 절반 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 말이지!”(83)


이 두 세계 앞에서, 싱클레어는 밝음과 어둠 모두를 포용하며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는 듯하다. 또한, 『데미안』 전편에 걸쳐 강조되는 것은 분명 ‘자기 자신으로 가는’일로, 자기 자신으로 가는 일이야말로 이 세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마땅한 존재 방식처럼 반복되어 서술된다. 그러나 이는 자칫 불분명하게 다가올 수 있다. 『데미안』을 포함한 헤세 문학은 흔히 ‘내면성’의 문학으로 불리며, ‘자아완성’ 혹은 ‘자기완성’으로의 길이 그 주된 주제가 된다. 그러나 ‘내면성’이나 ‘자기완성’만을 실종일관 강조하는 문학은 지루하고 공허하다. 우리의 내면성이 어떻게 외적 현실과 관계를 맺으며, 개인의 삶과 자아가 어떻게 사회와 연루되어 있는지에 대한 보다 면밀한 고찰이 필요하지 않을까. 이론가가 아닌 작가라는 점에서 삶을 논증하거나 설명하기보다는 서사를 통해 ‘묘사’하기에 작품이 이 대목에서 취약할 수 있다는 점을 안다. 그러나 내면성과 사회성 사이의 연결 고리가 최대한 논리적으로 선명하게 서술되었더라면, 우리는 보다 확고한 믿음 아래 그 길을 갈 수도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으로 나아가게끔 하는 문학의 기능


그렇다고 해서 헤세가 『데미안』에서 골몰한 내면성은 단순히 자폐적이거나 수동적인 반응의 결과는 아니다. 신비주의적 소산도, 낭만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으로 가는 길을 찾는 싱클레어의 관심과 집중은 삶에 편재하는 제약 속에서도 양심을 잃지 않은 채, 제약을 뚫고 살아 보려는 안간힘의 발로로 보인다. 스스로 선택한 이상을 따르며 살아가는 데미안을 봐도 그렇다. 결론적으로 『데미안』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인간 각자의 삶은 다시 반복되지 않는 특별한 존재의 삶이기에 세상의 밝음 뿐만 아니라 어둠을 인지하고 포용하며 스스로 선택한 이상에 따라 “자기 삶을 살아 내는”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는 이미 여러 번 반복되었던 결과를 통해 알 수 있듯,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작품은 이 지점 또한 놓치지 않고 있었다. 작품의 끝에서 전쟁터로 나서는 데미안은 조만간 유럽에 전쟁이 벌어질 것이고, 많은 사람이 이 전쟁을 막기는커녕 오히려 이 전쟁이 ‘터지기를’ 기다리고 환호한다고 말한다. 싱클레어 역시 급기야 전선에 나가기에 이른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삶은 어떠한가? 2020년, 여기 우리의 삶은 삶다운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나’의 중요성은 물론이고, 정신문화나 내면성은 한국 현대사의 많은 곡절 속에서 상당 부분 훼손되는가 하면 자연환경도 크게 손상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공동체의 습속이나 사회의 기율 역시 온전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에 냉정하게 되묻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헤세는 『데미안』을 통해 이 물음에 관한 한 가지 철칙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 삶다운 삶이란 사회적이든 개인적이든, 우리 각자가 여기에서 스스로 부단히 애쓰고 생각하며 돌아보는 데서 조금씩 만들어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계속적인 내적 갈등과 반성 속에서 주체는 자기 삶에의 용기를 가지고 책임 있게 자신을 구성하면서 큰 진실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헤세는 『데미안』에 이렇게 적은 바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고만이 가치를 지닌다.”(282) 마치 데미안이 싱클레어를 이끌어 그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었듯, 우리는 데미안과 싱클레어의 삶을 보여주는 헤세의 도움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혹자는 데미안을 100번 읽는 것보다 주식 서적 한 번 읽는 게 삶에 더 큰 도움을 가져오리라 생각할 수 있지만, 『데미안』은 우리가 다른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도록 만들 수도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데미안』이라는 문학의 기능은 “사람이 자기 자신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334) 일로 생각해볼 수 있겠다.





기본서

헤르만 헤세, 전영애 옮김, 『데미안』, 민음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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