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은 복수형이다

혼자 타는 방주는 없다

by 이장복

1. 다윈은 적자생존을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재난 상황을 상상할 때 본능적으로 홉스가 말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을 떠올린다.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짓밟아야 하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약육강식의 세계. 우리는 이것을 다윈의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다. 정작 다윈은 <종의 기원> 5판에서야 이 용어를 조심스럽게 인용했을 뿐이며, 오히려 <인간의 유래>에서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95번, 공감이라는 단어를 61번이나 사용했다.


다윈이 발견한 인류 진화의 진짜 비밀은 협력이었다. 날카로운 발톱도, 두꺼운 가죽도 없는 나약한 호모 사피엔스가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원시 지구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서로 뭉치고, 음식을 나누고, 아픈 동료를 버리지 않고 돌봤기 때문이다.


진화생물학자 브라이언 헤어는 이를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Survival of the Friendliest)"라고 명명했다. 가장 힘센 개체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가장 친화력이 좋은 개체가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디지털 대재앙이 닥쳤을 때, 근육질의 헬스 트레이너나 총을 든 프레퍼보다 더 오래 생존할 사람은, 바로 `이웃에게 밥 한 끼를 기꺼이 나눌 줄 아는 다정한 할머니`일지도 모른다. 친화력은 낭만이 아니라, 가장 강력한 생존 무기다.


2. 죄수의 딜레마를 넘어서


게임 이론에 죄수의 딜레마가 있다. 두 죄수가 서로를 믿지 못해 배신하면 둘 다 형량을 살게 되지만, 서로를 믿고 침묵하면 둘 다 가벼운 형량으로 풀려날 수 있는 상황.


디지털이 끊긴 세상은 거대한 `죄수의 딜레마` 실험실이다. 식량이 부족할 때, 내가 쌀을 숨기면(배신) 나만 당장은 배부르다. 하지만 상대방도 쌀을 숨기면(배신), 결국 공동체 전체가 굶어 죽고 약탈이 시작되어 공멸한다. 반면, 서로 조금씩 쌀을 내놓으면(협력), 모두가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이 게임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재난은 반복 게임이다. 오늘 나를 배신한 사람을 내일 또 마주쳐야 한다.


소규모 아날로그 공동체에서 배신자는 즉시 평판이 추락하고 도태된다. 반면 협력자는 신뢰 자본을 얻어 다음 위기 때 도움을 받는다. 결국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진 자들은 고립되어 사라지고, 이타적인 협력자들의 집단만이 끝까지 방주를 띄운다.


우리가 방주에 태워야 할 것은 똑똑한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어리석어 보이는 협력자들이다.


3. 우리는 서로의 환경이다


디지털 세상에서 나는 고립된 `점`이다. 싫은 사람은 차단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아날로그 세상에서 우리는 서로 얽혀 있는 `선`이자 `면`이다.


당신이 만나는 이웃, 직장 동료, 가족은 단순히 타인이 아니다. 그들은 당신이 숨 쉬고 살아가는 생태학적 환경 그 자체다. 내 옆 사람이 불안에 떨면 그 공포는 바이러스처럼 나에게 전염된다. 반대로 내 옆 사람이 평온하게 웃으면, 나 또한 안도감을 얻는다.


따라서 타인을 돕는 것은 자선 사업이 아니다. 나의 환경을 청소하는 행위다. 이웃의 배고픔을 해결해 주는 것은 내 식량 창고를 털리는 것을 막는 방범 활동이고, 이웃의 불안을 잠재워 주는 것은 내 정신 건강을 지키는 방역 활동이다.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살기 위해 우리는 손을 잡아야 한다. 당신의 생존 배낭에는 당신 몫의 비상식량뿐만 아니라, 옆 사람의 눈물을 닦아줄 손수건 한 장이 반드시 들어 있어야 한다.


4. 인간(人間),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것


동양 철학은 사람을 인(人)이라 쓰지 않고 인간(人間)이라 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즉, 관계 속에 있을 때만 비로소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


무인도에 혼자 떨어진 로빈슨 크루소는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었지만, 사회적으로는 죽은 상태였다. 그가 `프라이데이`라는 타인을 만났을 때, 비로소 그는 다시 문명인이 되었다.


디지털 문명은 이 사이(間)를 기계로 채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스마트폰이, 알고리즘이, 키오스크가 끼어들었다. 우리는 직접 닿지 못한 채 기계를 통해 간접적으로 연결되었다.


아날로그의 방주를 짓는다는 것은, 이 기계적인 중간 매개체를 걷어내고 다시 살과 살을 맞대는 것이다.

체온을 나누고, 눈빛을 교환하고, 서로의 냄새를 맡는 원초적인 접촉. 그 사이의 공간을 신뢰와 연대로 채우는 것.


그때 우리는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생활하게 된다. 짐승처럼 숨만 붙어 있는 생존이 아니라, 존엄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삶 말이다.


5. 방주는 나무로 짓지 않는다


이제 책을 마무리하며,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디지털 대재앙이 예고된 시대,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지금까지 우리는 손의 감각을 깨우고, 지식을 머리에 담고, 종이책을 모으라고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수단일 뿐이다.


아날로그의 방주는 튼튼한 잣나무로 짓는 것도, 최첨단 강철로 짓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사람의 연결로 짓는 것이다.


서로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

약속을 지키는 것.

어려울 때 외면하지 않는 것.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도 서로의 손을 놓지 않는 것.


이 보이지 않는 관계의 널빤지들이 촘촘하게 엮일 때, 그 방주는 어떤 거친 파도에도 뒤집히지 않는다.

생존은 단수형이 아니다. 언제나 복수형이다.


우리는 함께 살거나, 아니면 홀로 죽을 것이다.


이제 당신의 옆을 보라.

그곳에 당신의 방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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