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리즘이 떠난 자리의 고요

취향과 추천이 사라지자 비로소 마주한 '나'라는 낯선 타인

by 이장복

1. 당신의 취향은 당신의 것이 아니다


금요일 밤, 넷플릭스를 켠다. 화면 가득 당신의 취향에 맞는 98% 일치 콘텐츠가 쏟아진다. 유튜브를 켠다. 내가 평소 보던 채널과 유사한 영상들이 끝없이 스크롤된다. 쇼핑 앱을 켠다. 내가 지난주에 검색했던 신발과 어울리는 옷들이 나열된다.


우리는 이것을 맞춤형 서비스라고 부르며 편리해한다. 하지만 묻고 싶다. `그 취향은 정말 당신의 것인가?`


어느 날 갑자기 이 모든 추천 시스템이 멈춘다고 가정해 보자. 넷플릭스 첫 화면이 텅 비고, 검색창 하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유튜브의 알 수 없는 알고리즘이 더 이상 나를 이끌지 않는다. 서점에 갔는데 베스트셀러 코너가 사라지고 모든 책이 무작위로 꽂혀 있다.


당신은 그 막막한 자유 앞에서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이 결정 장애를 호소한다. 점심 메뉴 하나를 고를 때도 별점 4.5점 이상의 맛집 리스트가 없으면 불안해한다. 영화를 보기 전에 로튼 토마토 지수를 확인하고, 물건을 사기 전에 인플루언서의 후기를 검색한다.


우리는 실패하지 않기 위해, 타인의 데이터에 나의 선택권을 위임했다. 그 결과, 우리는 `선택할 줄 모르는 소비자`가 되었다.


알고리즘이 사라진 세상에서 우리는 당황할 것이다. 내가 진짜로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 내 혀가 원하는 맛이 무엇인지, 내 영혼이 끌리는 문장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내 취향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실 빅데이터가 분석해 내 입에 쑤셔 넣어준 사료였을지도 모른다.


2. 거울 방에 갇힌 사람들 (Filter Bubble)


알고리즘의 가장 무서운 점은 우리를 편안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싫어할 만한 의견, 낯선 정보, 불편한 진실은 교묘하게 걸러내고, 내가 보고 싶어 하는 것만 보여준다. 이것을 `필터 버블(Filter Bubble)`이라고 한다.


우리는 거울 방에 갇힌 셈이다. 사방이 내 생각과 똑같은 메아리로 가득 찬 방. 좌파에게는 좌파의 뉴스만, 우파에게는 우파의 뉴스만, 고양이 애호가에게는 고양이 영상만 보여준다. 세상이 이렇게나 내 마음과 똑같다니, 우리는 안도하고 확신한다.


하지만 알고리즘이라는 전원이 꺼지는 순간, 거울은 깨진다. 그리고 우리는 날것의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그곳에는 나와 생각이 정반대인 이웃이 살고 있고, 내 취향이 아닌 낯선 문화가 존재하며, 별점 테러를 당했지만 내 입엔 맛있는 식당이 있다.


디지털이 끊긴 세상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렸던 다양성의 본모습이다. 알고리즘이 떠난 자리는 고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동안 차단되었던 타인의 소음과 세상의 잡음으로 시끄러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소음 속에서 비로소 진짜 세상을 다시 배워야 한다.


3. 세렌디피티(Serendipity)의 죽음과 부활


알고리즘은 정확도를 추구한다. 내가 A를 사면 B를 살 확률이 높다는 통계에 기반한다. 여기에는 오차가 없다. 하지만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순간들은 대부분 오차에서 온다.


우리는 이것을 `세렌디피티(Serendipity, 뜻밖의 발견)`라고 부른다.


오래전, 동네 비디오 가게나 서점을 서성이던 때를 기억하는가? 제목이 특이해서, 혹은 표지가 예뻐서 우연히 집어 든 책이 내 인생을 바꾸기도 했다. 라디오에서 DJ가 틀어주는 낯선 음악을 듣다가 전율을 느끼기도 했다. 그곳에는 당신을 위한 추천이 없었다. 오직 나의 호기심과 우연한 만남만이 있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추천 시스템은 이 우연을 제거했다. `당신은 이런 걸 좋아할 거야`라고 단정 짓고, 실패할 확률을 `0`으로 만든다. 실패가 없으니 발견도 없다. 우리는 매일 비슷한 노래를 듣고, 비슷한 드라마를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한다. 삶이 납작해지는 것이다.


아날로그의 방주에 탑승한다는 것은, 이 우연을 허용하는 태도를 되찾는 것이다.


인터넷 검색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들어간 식당에서 맛없는 밥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실패한 경험조차 내 몸으로 겪은 나의 데이터다. 알고리즘 없는 세상에서의 탐험은 위험하다. 하지만 그 위험을 감수할 때 비로소 우리는 나만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4. 고독 속에서 들려오는 내면의 목소리


알고리즘과 네트워크가 사라진 후 찾아오는 침묵. 처음엔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지루하고 불안할 것이다. 스마트폰을 새로고침 해도 새로운 피드가 올라오지 않는 그 정적.

하지만 파스칼은 말했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방 안에 조용히 머물러 있지 못하는 데서 온다.`


외부의 신호(Signal)가 끊겨야 비로소 내부의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 유행하는 것, 알고리즘이 들이미는 것이 사라진 텅 빈 방 안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무엇을 느끼는가?
나는 무엇을 할 때 기쁜가?

그 고요 속에서 길어 올린 취향만이 진짜다. 누군가는 흙냄새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고 화단을 가꿀 것이고, 누군가는 활자가 주는 안식을 찾아 책을 펼칠 것이며, 누군가는 그저 멍하니 하늘을 보는 게 좋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은 취향의 발견을 넘어 주체성의 회복이다.


기계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시대는 끝났다. 이제 다시 내가 나를 알아가야 할 시간이다. 추천 목록은 사라졌다. 이제 당신의 인생이라는 메뉴판에서, 별점도 리뷰도 없는 온전한 당신의 선택을 주문하라.


맛이 없어도 괜찮다.

그것이 당신이 선택한, 당신의 삶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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