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가 끊기면 멈추는 세상, 그 거대한 모래성
복싱에는 `유리 턱(Glass Jaw)`이라는 용어가 있다. 화려한 기술과 강력한 펀치를 가졌지만, 턱에 가벼운 충격만 가해져도 허무하게 쓰러지는 선수를 일컫는 말이다.
21세기 현대 문명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유리 턱을 가진 챔피언이다.
우리는 인공지능으로 암을 진단하고, 화성에 탐사선을 보내며, 지구 반대편의 사람과 실시간으로 얼굴을 보며 대화한다. 겉보기에 이 문명은 완벽하고 전지전능해 보인다. 하지만 이 거인의 아킬레스건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바로 전기다.
과거의 문명은 느리고 투박했지만 끈질겼다. 로마의 수도교는 전기가 없어도 중력을 이용해 물을 날랐고, 조선의 봉수대는 서버가 다운될 걱정 없이 연기로 위급 상황을 알렸다. 그들은 자연의 힘을 빌려 썼기에 자연과 함께 멈추지 않고 돌아갔다.
하지만 현대 문명은 오직 전기라는 단 하나의 혈액에 의존한다. 발전소 터빈이 멈추는 순간, 우리의 교통, 통신, 금융, 상하수도, 의료 시스템은 도미노처럼 쓰러진다. 예비 전력이 바닥나는 3일 후, 도시는 거대한 콘크리트 무덤으로 변한다.
우리는 가장 높게 쌓아 올렸지만, 가장 쉽게 무너지는 탑 위에 살고 있다.
우리는 모든 것이 연결된 사회(IoT)를 유토피아로 꿈꿔왔다. 냉장고가 우유가 떨어진 것을 감지해 마트에 주문을 넣고, 스마트 워치가 내 건강 상태를 병원에 전송한다. 하지만 시스템 공학에서 초연결은 곧 초위험을 의미한다.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말은, 어느 한 곳만 끊어져도 전체가 마비된다는 뜻이다.
과거에는 옆 마을에 불이 나도 우리 마을은 멀쩡했다. 하지만 지금은 특정 데이터 센터에 불이 나면, 전국 모든 식당의 결제 단말기가 멈추고, 택시를 잡을 수 없으며, 메신저가 불통이 되어 업무가 마비된다. 우리는 단 한 번의 클릭 실수나 부품 고장으로 국가 전체를 멈춰 세울 수 있는 `단일 실패 지점`을 너무 많이 만들어버렸다.
효율성을 위해 재고를 쌓아두지 않는 적시 생산 시스템은 평화 시에는 비용을 절감해 주지만, 위기 시에는 끔찍한 공급망 붕괴를 초래한다. 마트의 진열대는 하루 만에 비어 가고, 주유소의 기름은 이틀이면 동난다.
우리는 효율성이라는 신을 숭배하느라, 회복 탄력성(Resilience)이라는 안전장치를 모두 팔아치웠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결정적인 차이는 고장 나는 방식에 있다.
디지털은 `이진법(0 또는 1)`이다. 작동하거나, 아니면 완전히 멈추거나 둘 중 하나다. 스마트폰 배터리가 1% 남았을 때는 모든 기능을 쓸 수 있지만, 0%가 되는 순간 벽돌이 된다. 중간은 없다.
반면 아날로그는 그라데이션이다. 태엽 시계는 감지 않으면 서서히 느려지다가 멈춘다. 종이책은 물에 젖어도 말리면 읽을 수 있고, 찢어지면 테이프를 붙여서 볼 수 있다. 촛불은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전구처럼 필라멘트가 끊어져 갑자기 암흑을 만들지는 않는다.
재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최고 성능이 아니라 최소 기능의 유지다. 최신형 전자식 도어록은 배터리가 방전되면 9V 건전지를 사러 편의점을 헤매야 하지만, 구식 열쇠는 녹이 슬어도 문을 열 수 있다.
디지털은 완벽해 보이지만 충격에 깨지기 쉽고(Fragile), 아날로그는 불완전해 보이지만 충격을 흡수하며 버틴다(Robust). 우리가 방주에 실어야 할 것은 바로 이 투박한 끈기다.
문명은 거대해졌지만, 그 안의 개인은 소인이 되었다. 우리는 시스템 없이는 하루도 생존할 수 없는 인큐베이터 속의 아기가 되었다.
돈을 낼 줄만 알지 쌀을 씻어 밥을 지을 줄 모르는 사람, 보일러 버튼을 누를 줄만 알지 추위를 막기 위해 창문에 뽁뽁이를 붙일 줄 모르는 사람, 정수기 물만 마셔봐서 냇물을 끓여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
시스템이 붕괴했을 때 가장 먼저 패닉에 빠지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고 살던 도시의 중산층일 것이다. 그들은 돈(신용화폐)이 휴지 조각이 되는 순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 취약성의 시대를 건너기 위해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강하지 않다. 우리의 스마트폰이 똑똑한 것이지, 우리가 똑똑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아파트가 튼튼한 것이지, 내 생존력이 튼튼한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이 유리 턱을 보호할 가드를 올려야 한다. 편리함의 스위치가 꺼졌을 때, 내 손으로 불을 켜고 물을 길을 수 있는 야생성을 회복해야 한다.
1부에서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 확인했다. 소유권도, 기억도, 취향도, 그리고 생존 능력까지.
이제 절망은 끝났다. 텅 빈 배낭을 확인했으니, 이제 그 안을 채울 차례다. 어떻게 다시 내 몸과 정신을 무장할 것인가? 어떻게 무너지는 문명 속에서 나만의 방주를 띄울 것인가?
그 구체적인 설계도가 다음 장부터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