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풍부함과 애수로 빚어진, 마침내 만개하는 로맨티시즘
포스트 펑크 리바이벌이라는 페티시즘적 유행은 영국 대중음악시장을 휩쓸고 지나가며 몇몇 밴드들에게 스타덤을 안겼고 결국에는 그들을 하이프(hype)의 부담감으로 짓눌러 몰락하게 만들었다. 대중음악산업 그리고 NME를 위시한 ‘영국성’에 천착하는 평론지들이 주도했던 일종의 ‘장르적 젠트리피케이션’이 세대의 환란을 일으키는 폭풍이 되었다가 걷힌 뒤에야, 우리는 포스트 펑크를 어떠한 색안경 없이 듣고 또 만들 수 있게 되었다. 2010년대 후반부터는 어떠한 팝적 전형성에 얽매이지 않고, 재즈나 익스페리멘털 등등의 무작위한 문법들을 삼키고 뱉으며, 그렇게 장르음악의 경계를 넘나들며 다채롭고 완성도 높은 음악을 선보이는 포스트 펑크 밴드들이 등장하고 있다. 오늘날의 런던은, 마치 40년 전 그랬던 것처럼 ‘사색적 펑크’들의 창작적 역량이 모이고 폭발하는 용광로의 역할을 다시금 해내기 시작하고 있다. 프로그레시브 음악에 동시대성을 부여하며 날뛰는 블랙 미디, 완성도 높은 데뷔 앨범으로 2021년에 조이 디비전을 소환해 낸 드라이 클리닝, 혹은 셰임 등의 요즈음 런던 포스트 펑크 밴드들은, 악틱 몽키스에게 쏟아졌던 것 같은 평단과 대중의 호들갑 없이도 묵묵히 제 자리에서 전진하고 있다.
블랙 컨트리, 뉴 로드 역시도 이러한 흐름 속에서 등장해 작년 환상적인 데뷔 앨범을 냈지만, 이들의 방점은 셰임이나 드라이 클리닝 같은 동료 신예 밴드들과는 다른 곳에 있다. 이 두 밴드가 70년대 말-80년대 초를 복원하는 재현의 미학에 천착한다면, 블랙 컨트리, 뉴 로드는 포스트 펑크의 장르음악적 성격에 그다지 얽매이지 않는다. 1집에서 선보였던 이들의 인스트루멘틀은 얼핏 들으면 포스트 펑크 같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슬린트 풍의 포스트 록 연주를 떠오르게 하고, 재즈적 어프로치가 인상적인 멤버 루이스 에반스의 색소폰 활용은 본 이베어의 2집 “Bon Iver, Bon Iver”(2011, Jagjaguwar / 4AD)에서 들었던, 금관악기들을 겹겹이 쌓아 연출했던 환상적인 사운드 레이어와 닮아 있다.
본 이베어를 떠오르게 하는 애수와 목가적 분위기는 새로 발매된 2집 “Ants from Up There”에서 본격적으로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이번 앨범은 다른 포스트 펑크 앨범들보다는 본 이베어의 2집, 플릿 폭시즈의 데뷔 앨범 “Fleet Foxes”(2008, Bella Union / Sub Pop), 혹은 컬트적 인기를 가진 앤틀러스의 컨셉트 앨범 “Hospice”(2009, Frenchkiss)의 사운드와 더 닮아 있다. 이 세 앨범들은 공통적으로 포크의 환대하는 따뜻함을 간직한 채, 챔버 팝의 현악 편곡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세련됨과 정갈함을 부여하는 방식을 취하며 21세기의 클래식이 되었다. “Ants from Up There”는 앞선 세 앨범과 같은 고전이 될 저력을 갖고 있다.
“Ants from Up There”는 ‘Intro’에서 ‘Chaos Space Marine’으로 이어지는 어쿠스틱 세션과 현악 편성의 환상적인 균형을 통해 문을 연다. 기름을 바른 듯 매끄럽게 등장하는 ‘Chaos Space Marine’의 피아노 코드 반주 속 보컬 라인과 이윽고 폭발하는 인스트루멘틀은, 아케이드 파이어나 포크의 세례를 받은 이탈리아 아트 록이 가졌던 동적인 힘, 혹은 미트 로프를 떠오르게 하는 뮤지컬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앨범의 서두에서부터 떠오르는 이러한 인상들은, 작곡의 치밀한 구조가 가진 프로그레시브함과 서사적 탄탄함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넘어가는 트랙들을 따라가며 느껴지는 것은, 이 앨범이 환상적으로 재전유한 포스트 록의 전략이다. 형해화된 포스트 록의 문법을 하나로 도식화하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여러 포스트 록 밴드들은 리프와 같은 구조나 소리의 텍스쳐들을 ‘전개’하기보다는 병렬적이고 반복적이게 늘여놓다가 이것을 강박적으로 차곡차곡 쌓고 그러한 ‘구축’의 끝에 터트려 황홀감을 선사하는 방식에 익숙하다. 하지만 이들이 재료로 삼는 소리들이 리버브를 위시한 공간계 이펙트를 통해 구축되어 명확히 구획되지 않고 공간을 맴도는 잔향들이나 하이 게인을 통해 헤비니스를 얻고 압도의 미학을 뿜어대는 헤비한 기타 리프들이라면, 이번 신보에서의 블랙 컨트리, 뉴 로드는 ‘소리를 차곡차곡 쌓고 터트리기’에 공을 들이되 훨씬 다양한 수단들을 경유하고 자신들의 무기로 삼는다. 앞서 언급한 색소폰과 현악기들에서부터 플루트, 만돌린, 마림바, 밴조에 이르는 다채로운 악기들이 거리낌 없이 활용된다. 이러한 특징은, 올해 들었던 것들 중 가장 아름다운 트랙(아직 올해는 한 달밖에 안 지났지만)이라 감히 이야기할 수 있을 ‘Bread Song’, 혹은 후반부의 환상적인 대곡 ‘Basketball Shoes’ 따위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가령 스티브 라이히의 영향을 받은 ‘Bread Song’은 미니멀한 인디 포크 풍의 기타 아르페지오와 그 위에서 덤덤히 진술하는 보컬로 앙상하게 출발하다 현악, 색소폰 등의 레이어를 차례차례 차곡차곡 덧칠하고, 결국에는 황홀경의 맥시멀리즘에 도달한다. 12분 37초짜리 마지막 트랙 ‘Basketball Shoes’도 유사한데, 여기에서는 다이노소어 주니어의 제이 마스키스나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케빈 실즈를 떠오르게 하는, 퍼즈를 잔뜩 먹어 발광하는 소음이 되어버린 기타 톤을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소리의 겹들 그리고 울부짖는 보컬과 함께 폭발시켜 이성 너머의 감각세계를 열어 젖힌다.
찢어지는 아픔을 겨우겨우 먹먹히 뱉어내는 가사와 낭만주의의 정점에 다다른 인스트루멘털의 교차 역시 인상적이다. 이는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일렁임을 선사한다. 스스로와, 연인과, 일상과, 그리고 보통의 것들과 불화하지 않고서는 뱉어낼 수 없는 아포리즘들과 단말마들이 “Ants from Up There”의 노랫말이 되어 흘러 간다. 그런데 한 편으로 아쉬운 것은 처절하고 덤덤한 특유의 진술적인 보컬을 이번 앨범을 끝으로 들을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마치 여러 이펙트들과 팔세토를 걷어낸 저스틴 버논처럼 노래하던 보컬리스트 아이작 우드가, 앨범이 릴리즈되기 나흘 전인 1월 31일 밴드를 떠난 것이다. 특유의 우울한 보컬과 결합하여 힘을 발휘하던 블랙 컨트리, 뉴 로드의 리릭시즘이 앞으로 어떤 형태로 전개될 것인지, 그 상을 쉽게 그리기는 어려워진 것 같다. 앨범을 들으며 내내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보컬의 호소력에 감탄할수록 아쉬움은 점점 커진다.
‘포스트’라는 접두사가 붙은 장르음악들은 한동안 이름에 걸맞지 않게 진부했다. 벌써 40년이 넘어가는 포스트 펑크와 30년이 되어가는 포스트 록의 역사가 축적되며, ‘이탈’ 자체가 하나의 형식이자 문법이 되었고 밴드들은 ‘새로운 것’을 만들기 위해 일련의 공식을 따라가는 모순적인 창작을 했다. 예컨대 작년 모과이와 갓스피드 유! 블랙 엠퍼러의 신보 소식을 들었을 때, 이제껏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 이는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어떤 ‘뻔함’들 속에서 새로운 ‘포스트-‘ 장르음악의 가능성에 관한 회의만이 남은 지금, 시의적절하게 등장한 “Ants from Up There”는 예상 못한 경이감을 선사하며 패러다임을 뒤흔들고 있다.
“Ants from Up There”, Black Country, New Road
2022년 2월 4일 발매
정규 앨범
장르: 인디 록, 아트 록, 챔버 팝, 포스트 록, 인디 포크, 챔버 포크, 포스트 펑크
레이블: Ninja Tune
평점: 9.2/10 (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