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나는 당신들의 아랫사람이 아닙니다]

누군가에게는 당연하지 못한 당연함

by 이제

이것은 폭력과 위계 질서로 대표되는 가부장제 속에서 피해자이자 가해자로 자라온 여성의 이야기다.


그 진절머리나는 그림자에서 벗어나고자, 서로에게 그 어떤 폭력도 행사하지 않는 동등한 인간관계로 맺어진 가족을 만들고자, 타협 없이, 차가운 분노와 날카로운 이성으로 무장한 채 어떤 장애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뚫고 나가는 여성의 진실된 투쟁 기록이다.


또한 이것은 나를 비롯한 모든 여성들의 서사가 겹쳐지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일을 겪지 않은 여성들이, 앞으로도 겪지 않을 여성들이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비단 결혼과 시가에 관한 이야기만이 아니다.


검은 봉지를 들고 가는 뒤에서 '그거 뭐냐, 좀 보여 주라'고 이죽거리며 집 앞까지 끈질기게 따라오는 같은 동네 동급생, 지나가면서 갑자기 '슴만튀', 아니면 '엉만튀'하거나 얼굴에 침을 뱉고는 낄낄거리는 어디의 누군지도 모르는 남학생. 밤에 환한 등불 밑에서, 아니면 대낮에 학교 앞에서 성기를 보여주거나 자위하는 성인 남성. 자신의 의견을 기탄없이 피력했다는 이유로 '너 같은 건 결혼해서 남편한테 두들겨 맞아봐야 정신을 차린다' 는 둥 지껄이는 손위 남성.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 그리고 맞는 여성에게 '잘못했다고 해라'라며 타이르는 사람들...


이건 과연 특정 개인의 이야기일까?


아무도 그들에게 사람을 그렇게 대할 권리를 주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에게 그럴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중요하다.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권력'. 누군가는 '감히' 생각지 못하는 것을 떠올리고 행동으로까지 옮길 수 있는 권력. 그것이 그들에게 있었다. 그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의식 속에 부유하는 것일 뿐이었지만 바로 그렇기에 실재적으로 나타났다.


이런 자들을, 나는 마음 속에서 가장 끔찍한 죽음이 무엇일지 숙고하면서 오체분시하고 부관참시하며 사돈의 팔촌까지 구족을 멸하기도 했지만(주여 용서하소서) 그것은 나에게 고통을 줄 뿐 그들에게 눈곱만큼의 위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확실하게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알고 있었기에 그렇게 했다. 단 하나의 이유. 내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역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인 내가 자기들보다 '약했기' 때문에 나를 어떻게 대하든 자기들에게 돌아오는 피해가 없다고 알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모멸감으로, 때로는 자신에 대한 주입된 수치심으로 '그때 그 자들'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여성이 과연 있기는 할까? 단언컨대 없다. 이 책에서 지적하듯이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잘못된 구조 속에서 '약자(혹은 아랫사람)'로 규정된 자들이 피해자석을 벗어날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작가와 친구들이 놀라움과 두려움 속에서 속삭였던 중학생 시대의 그 경험은 수없이 변주되며 몇 십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곳에 버티고 있다.


가족에 대한 호칭을 바꾸자는 사람과 결사 반대하는 사람이 서로 '대체 이게 뭐라고?!'를 외치면서도 비켜서지 않는 것은 작가의 지적대로 이것이 '가족은 무엇인가'에 대한 가치관 싸움이기 때문이다. 종교를 가진 사람에게만 믿음이 있는 게 아니다. 가치관. 사람에게 있어서 이것보다 맹목적인 믿음은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 작가는 더 아래로 파고들어가 그 가치관 아래에 어떤 것들이 자리잡고 있는지 끄집어낸다. 바로 남성우월주의를 토대로 한 가부장제와 그 부산물, 여성이 가장 아래를 차지하는 서열 제도를. 그리고 한편으로 그것의 피해자면서, 그것이 싫으면서 벗어나지 못하고 허덕이는 인간의 모습들을.


나는 그런 의미에서 작가인 배윤민정이 그 배우자인 두현과 나눈 대화, 특히 두현의 말이 아주 적확하게 문제를 짚고 있음과 동시에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본다. '남성'인 두현은 "내가 무엇을 하고 무엇을 느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게 구조적 문제라는 사실을 깨닫는 게 중요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불평등한 제도의 예를 든다. 같은 가격에 남성에게는 고기 300g을, 여성에게는 200g을 팔도록 되어 있는 제도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성 차별에 대한 논의는 남성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구조가 잘못되어 있다는 지적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이', '내가', '잠재적 가해자 취급' 운운하는 말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음과 동시에 본인들이 그 구조를 만든 사람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여성(혹은 페미니스트들)이 그 쳇바퀴 안에서 놀라고 멍한 얼굴로 차가운 인식의 벽을 마주해야 했던가.


이와 아주 흡사한 대화를 '남성'인 누군가와 나눈 적이 있었다. 차별에 대해 말하는 내게, 이런 사회 속에서도 아름다운 부부 관계를 이루어나가는 부부들도 있다고, 다른 이들에게 폭력(아마도 공격받는 느낌을 주는 것을 가리키는 것일 테다)을 휘두르면서까지 관철해야 할 것은 없다고 그는 말했다. 나는 '이것은 이미 휘둘러졌고 지금 휘둘러지고 있는 다양한 폭력에 대한 피해자의 이야기다. 피해자에게 말조심을 하라는 것은 더한 폭력이 아니냐. 잘 사는 부부들의 이야기는 일제 시대에 착한 일본인같은 의미밖에는 없다'고 반박했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두현의 말과 비슷했다. '일제 시대'라는 잘못된 사회 구조 속에서, 그것을 등에 업은 일부의 성공, 선행과 시혜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나의 표현이 부족했는지 책 속의 낯설도록 아름다운 공감과 동의의 장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는 자신들의 성별을, 자신들의 언행을 '일제 시대'에 비유했다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거기에 (아주 익숙한) 빗나간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런 식으로는 아무도 설득할 수 없다". 그리고 대화는 끝이었다.


아마 그는 페미니즘이란 '오빠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애초에 나는 이 문제에 왜 '설득'과 '이해'가 필요한지조차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약자 차별'과 그를 토대로 한 성별 차별, 그에 의한 실제적 피해는 '있다'. 남녀를 불문한 수많은 피해자와 수치가 말한다. 더 뭔가를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하나? 나는 만인에게 적용되는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대한민국에 사는데 '그들만의 리그'는 그것을 '설득해야 하는' 어떤 다른 가치를 추구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반복하지만 구조적 문제에 대한 지적을 특정 성별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 특정 성별이 실제적으로 구조적 문제의 큰 부분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피해자와는 달리 자신과 구조를 별개로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가 배윤민정이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냄으로써 밝혀낸 이 구조적 문제는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의 사회학적 관점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차별'이라는 현상이 없다고 우김으로써 자신이 차별적인 구조의 일부라는 사실을 외면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대목은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에서 오찬호가 차별을 대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 중 '차별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꽤 많다. 많은 이유는 가해자가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라고 표현한 것의 변주이다. 배윤민정이 가족들 사이에서 문젯거리처럼 취급받고 입을 다물 것을 요구당하는 많은 장면들은 마치 오찬호가 스스로를 대표로 내세우며 비판했던 '모두가 구조로 인해 피해를 보고 있으면서도 고개를 숙이고 그 속에 안주하면서 오히려 목소리를 내는 자를 비난하는 모습'을 상황극으로 풀어 쓴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배윤민정은 오찬호가 말한 '포기하지 않고 달걀이 살아서 바위를 넘게 하는 사람'이다.


그녀를 보면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다.


외상센터의 이국종 교수

범죄심리학자 이수정 교수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의 오찬호 교수...


활동 분야가 전혀 다른 이 사람들이 함께 떠오르는 것은 아마 이 사람들이 품고 있는 정서가 공통적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바뀌지 않는 것에 대한 피로감과 일종의 포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해야만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 그리고 그 사명감 아래서 연료가 되어 타오르는 분노가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들이 느끼는 좌절감과 심적 고통이 큰 것을 알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 굳건함을, 그 분노를 사랑한다. 이런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삶은 지금 어땠을까? 나는 그 굳건함과 분노를 배윤민정에게서 보았고, 그래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 시선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온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아, 생각만 해도 답답한 내 주변의 그런 상황들 속에서 나는 정말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배윤민정은 '모두가 존중받고 사랑하는 가족'을 원했다. 그게 여의치 않다는 것을 안 다음에도 물러나지 않았다. 결과는 '사이 좋은' 가족의 해체였다. 내게는 배윤민정처럼 그 무슨 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 그리고 원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그런 강하고 단단한 마음이 있을까. 나는 내가 사랑하는 그들처럼 살 수 있을까.


물론 누군가의 끊임없는 희생과 인내를 필요로 하는 '사이 좋음'은 지킬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파괴'는 '파괴'고 두려운 것이다. 누군가가 함께 해 주지 않는다면 더더욱.


내게는 배윤민정처럼 그 무슨 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 그리고 원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그런 강하고 단단한 마음이 있을까. 나는 어떤 발걸음을 먼저 내디뎌야 할까. 아이를 재우고 밤에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내 앞의 어둠을 노려보며 생각을 거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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