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유머 속에서 번뜩이는 칼날

by 이제

돈만 있으면 다 되는 우리나라 좋은나라


나는 외국 생활을 생각보다 오랫동안 했다. '생각보다'는 '내 생각보다'라는 뜻이다. 원래 1년을 있을 생각으로 갔던 것이 뒤에 0이 하나 더 붙을 때까지 눌어붙어 있었으니, 생각보다 '훨씬' 오래 있었던 셈이다. 여기서 내 글을 볼 얼마 되지 않은 분들 중에 혹시 그 외국이 영미권이 아닐까 생각하는 더 얼마 되지 않을 분들을 위해 부연하자면, 그렇지는 않고 서로 자주 잘근잘근 씹어 대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이었다.


그 일본 생활을 접고 한국에 들어왔을 때, 나는 벌어놓은 돈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버젓한 박사 학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눈에 띄는 경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삼십 대 후반에 접어들고 있었다.


여기까지만 읽고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분들이 계실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러고도 나는 아주 '괜찮'았다. 가끔 괜찮은 나의 일상을 비집고 들어오는 이질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블로그에도 일상 만화로 끄적거린 적 있는 '버스가 오십니다'라는 해괴한 존대법이나, 지하철에 똑같은 얼굴의 모델들-하나같이 여성이다-이 늘어선 '성형외과 광고'가 하나 둘도 아니고 말 그대로 쫙 깔려 있는 점이나, 안부를 물었던 주변 사람들 중에 이상할 정도로 '임용고시'나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던 점들이 그랬다. 그것들은 괜찮게 흘러가는 일상에서 나를 툭툭 치며 정신이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사건이 있었다.


명절이었다. 아마도 추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국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처음 맞는 명절이었는데, 친척 내외분들이 우리 집을 방문하셨다. 오랜만에 나를 봐서 반가우셨는지, 그래서 다시 외국에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는지 그분들은 '한국이 좋다'라는 것을 나에게 설파하기 시작하셨다. 그리고 그 잊을 수 없는 말이 등장했다.


"한국이 얼마나 좋은데. 돈만 있으면 못할 게 없어. 다 돼~."


나는 생각했다. 이건 어떤 반어법이나 은유적 표현인가? 하지만 둥글둥글하고 하얀 얼굴에 낯익은 미소를 띠고 나를 바라보시는 그분의 얼굴을 보고 정말로 그분이 그 의미 그대로 말하신 것임을 깨달았다. 무슨무슨 영화에서 악당들이나 입에 올릴 것 같은 말을, 어렸을 때부터 보고 자란 내 친척이, 나에게 했다는 현실에 소스라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분은 이런 물질만능주의를 대표하는 대사를 태연히 내뱉고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었다. 이분이 원래 이런 분이었을까? 나는 반문했다.


"그게 좋은 나라예요?"


나의 의도는 명백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역시 한 치의 망설임도 부끄러움도 없는 "그러엄"이라는 대답이었다. 부끄러움과 자괴감을 느낀 것은 나였다. 한국에 돌아온 후 처음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고 싶었다. 물론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돈이 1도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한국에 눌러살고 있다.(먼산)




나를 부끄럽게 하는, 그러나 동시에 나를 대변하는 외침


이 책을 보면서 내 마음속에는 내내 그때 그 부끄러움과 자괴감이 떠돌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그것보다 더한 것은 그 선연했던 기억들이 한국에서 보낸 몇 년간 '우리나라는 어쩔 수 없어', '여기서 살려면 어쩔 수 없어'처럼 불가항력적인 것으로 포기되고 합리화되어 무감각해진 자신에 대한 자각이었다. 부끄럽고 충격적인 것들이지만, 이것은 내내 아팠던 곳의 원인이 밝혀졌을 때와 같은 충격이었다. 낫기 위해 무언가를 시도할 수 있는 미래지향적 충격 말이다.


유머를 한 줌 넣어 버무리기는 했지만 내심으론 한숨과 안타까움과 때로는 분노까지 느껴지는 날 선 문장으로 작가는 우리의 이 합리화를 난도질해 올바르게 부끄러워하고 올바르게 분노하지 못하는 우리들의 비틀린 의식과 행동을 끄집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내 눈앞에 들이밀며 묻는다.


'이걸 정말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너는 어떠냐?'


나는 부끄러워 감히 대답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부끄러움은 미래를 향한 행동을 재촉하는 부끄러움이다. 그래서 참으로 시원하다.


책을 읽어보면 작가 역시 '열심히 살지만 돌아오는 것은 적은' 전형적인 일개미의 삶 속에서 버둥거리고, 그 쳇바퀴는 이미 학생 때의 신문 배달 시절부터, 혹은 그 이전부터 돌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가 이 사회를 보면서 한탄과 분노를 고스란히 느끼는 이유 역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직접 그 속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렇기에 이 책의 주장은 더 삶의 냄새를 풍기고, 더 큰 울림을 갖는다. 단순히 '열폭'이 아니라-그렇게 치부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시대를 열심히 살면서도 '괜찮게' 살지 못해 끊임없이 고통받는 수많은 '평균치 이하'의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바로 내가 내고 싶은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제일 작은 자에게 승리감을 허하라


또 다른 기억이 있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름을 모를 리 없는-여러 가지 의미에서-굴지의 대기업에 '계약직'으로 면접으로 보러 갔을 때였다. 일본인 기술 고문의 통역직이었는데, 나를 포함해 세 명이 면접을 보게 되었다. 면접을 기다리다가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두 명 중의 한 명이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면접을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니, 그럼 벌써 다 정해진 것 아닌가?'


다른 한 명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추천받은 사람은 자신감이 있었고, 반대로 나머지 한 사람은 힘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면접을 보러 들어간, 이상할 정도로 널찍한 방에는 회사 직원이 두 명, 일본인 고문이 두 명 있었다. 그 자리에서 바로 순차, 동시통역을 시연한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직원들의 질문은 점점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남자 친구 있어요?"

"결혼할 생각 있어요?"

"여기는 업무량이 아주 많은데 체력에 자신 있어요?"

"야근할 수 있어요?"


'일하다가 결혼한답시고 귀찮게 할 거냐?'와 '까라면 깔 수 있냐?'가 이 질문의 의도인 것은 명백했다. 이 사람들이 이럴 수 있는 이유도 명백했다. 기업 직접 고용이 아니라 파견 회사를 끼고 고용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혹시 직접 고용에도 이딴 식으로 하나요? 면접받은 적이 없어서^^) 이것이 불과 몇 년 전 일이다. 그리고 여기는 한국 굴지의,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대기업이었다. 그들은 지극히 진지했고 부끄러워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기업이라는 회사가, 그리고 그 회사의 일원이라는 자격이, 그리고 면접관이라는 지위가 있으면 이런 질문쯤은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나는 성격이 더럽다. 처음에는 의아해하면서도 멋모르고 진솔하게 대답했다. '없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을 끈질기게 듣다 보니 차츰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어차피 쓸 사람을 다 정해 놓고서는 이 무슨 구역질 나는 질문들이란 말인가. 길고 긴 동어반복적인 질문들이 끝나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 봐라'라는 말에 나는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했다. 내가 용기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차피 무슨 말을 해도 뽑히지 않을 테니까'라는 자신(?)이 있어서였다. 면접 전의 그 대화가 없었다면 나는 화를 눌러 참고 그냥 '잘 숙고해 주십사' 고개를 숙였을 것이다.


내가 했던 말의 정확한 워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대체적인 골자는 '기업과 일하는 개인 사이에서 어느 한쪽만 희생하는 방향으로 치우친다면 그것은 좋은 관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발전하는 관계가 사회적으로 바람직하고 결국 모두를 위한 것이다' 어쩌고 하는 말이었다. '공과 계열에서도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순간 인문적 지식이 없어서는 안 된다. 나는 그것을 제공할 수 있다' 저쩌고 하는 깨알 같은 어필도 잊지 않았다. 내가 회사와 개인 운운하는 말을 입밖에 낸 그 순간 회사 직원들과 고문들 사이에 흐르던 정반대의 기류를 나는 잊지 못한다. 어쨌든 표정이 썩어 난 것은 회사 직원들 쪽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어느 한쪽은 내 이야기에 공감했다. 나는 만족감을 느꼈다.


고지되었던 것보다 더 빨리 전화를 받았을 때 만족감은 승리감이 되었다. 전화 저쪽에서 파견 회사 직원은 내게 '면접을 아주 잘 보셨나 봐요?'하고 물었다. 어차피 보잘것없는 계약직의 승리감이었으나, 어쨌든 승리감은 승리감이었다. 면접에 붙었다는 것이 아니라-아 물론 그것도 기뻤다- 올바른 것에 대한 생각이 받아들여졌다는 것에 대한 승리감이었다. 비록 그것이 내 마지막 승리감이었지만 말이다.


나의 그 승리감은 순전히 자포자기와 운이 빚어낸 것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그것이 '상식'이 되도록 해야 된다고 말한다. 내가 누구이든 무엇을 가졌든 상관없이 정말로 중요한 것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말이다. 모두가 고통받으면서 '아닌 것' 앞에 고개 숙이는 패배감 가득한 사회가 아니라, 가장 작은 자에게조차 그 승리감을 허하는 사회가 정말로 좋은 사회라고. 바르고 정직한 것을 통해 '승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의 '평균치'가 올라가야 비로소 '괜찮은' 사회가 된다고 말이다.


물론 회사는 회사가 원하는 사람을 고를 권리가 있다. 하지만 첫 번째로 원하는 사람의 기준을 그따위로 잡아서는 안 되고, 두 번째로 그것을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그딴 질문들로 사람을 열 받게 해서는 안 된다. 당연하지 않은가? 사람이 존중받는 것이 당연하다면 필연적으로 권리가 모든 것을 허락해주지 않는다는 것 역시 당연해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보시다시피 그렇지 않다. '왜 현실은 그게 당연하지 않은가?'에서 시작해서 '나는 어떤가?'를 지나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로 나아가는 좁은 길을 이 책은 보여주고자 노력하고 있다.


책이 알려주는 그 길은 너무 좁아서 아주 의외의 것까지 신경 써야 한다. 예를 들어 택배를 시키고 총알배송이 아니어도 만족해야 하고, 피자를 시키고 30분 안에 오지 않아도(!!) 열 받지 말아야 한다. 비정상적인 상황을,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는 상황을 너무 당연시하는 우리 자신을 깨달아야 한다. 이 상황을 당연시하고 받아들일수록, 충족시키지 못하는 곳을 비난할수록, 더 많은 사람이 죽음으로 내몰린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는 숨 쉬듯 당연하게 이런 일을 한다. 깨닫기 어려우니, 아니면 알고 있어도 심각하게 생각지 않으니 변화는 요원하다. 하지만 대기업이 저런 일을 하는 게 옳지 않다면, 나도 이런 일을 하는 게 옳지 않은 것 역시 당연하다.


그런 마음으로 포기하지 않고 '계란이 살아서 바위를 넘도록'하는 사람이 없다면 사회는 바뀌지 않는다. 우리가 그 사람들이 빚은 사회를 살아가고 있음은 물론이고, 다음 세대에 또 다른 바위를 넘은 사회를 넘겨줄 의무가 있는 것이 당연하며, 무엇보다 우리 자신에게 그 수혜자가 될 권리가 있지 않은가.




종교란 과연 그런 것일까?


이 책에 대해 한 가지 불만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에 대한 비난'이다. 여러 부분들이 나오고 공감이 가기도 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약간 '괜찮지 않았'다. 그의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모르고 성공 강박에 사로잡힌 A 씨가 남들에게 수치심을 주고 괴롭히는 것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같은 짓을 하면서 열심히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리며 이겨내니 그래서 종교는 좋지 않다는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사이의 논리적 관계를 잘 이해할 수 없다. 기도가 실제로 A 씨의 마음에 위로를 준다면, 그것은 나쁜 것인가? A 씨의 인격이 부족하기 때문에? 문제는 A 씨의 강박에 있고 기도에 있지 않다. 나아져야 할 것은 강박이지 기도가 아니다. 그 논리가 성립되려면 A 씨가 기도를 멈추면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이런 비판은 실은 다채로운 면이 있는 종교를 아주 '얄팍하게' 평가한 것이다.


이렇듯 성격 더럽고 회의적인 나는 의외로 종교가 있는데, 내 별 것 아닌 이야기를 들먹일 필요도 없이 역사와 수많은 사람들의 삶 속에서 증명된 이 종교의 아주 중요한 효용(?)은 '자기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진심으로 자기 삶과 이 종교를 철저히 대면시키는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효용이며 그마저도 실패와 실패를 반복하기에 수많은 사람들의 오해와 비난과 심지어 비웃음마저 자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저런 비난이 나오는 것도 이해는 된다. 여기서 길게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사실 '자기 잘못을 깨닫는' 효용과 이 책이 주장하는 '부끄러움'과는 아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아픔과 수치를 무릅쓰며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나아가 거기에서 등을 돌릴 결심과 힘을 준다는 면에서 더 유용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어쨌든 그런 부분을 제쳐놓고 보면 사실 이 책은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나 개인에게 있어서도 큰 도움이 된다. 분기별로 한 번은 보면서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뒤에 이 책을 두고 '카페에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으면 좋겠다는 작가의 바람이 적혀 있는데 정중히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네 아니오^^


첫 번째는 이 책은 가볍게 읽을 수 없고 읽어서도 안 되며, 두 번째로 카페에서 읽는다고 책이 가벼워야 될 이유는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럼 그렇게 알아두십셔 작가님.


물론 앞으로도 기업에서는-그리고 일부 남성들도-싫어하겠지만 앞으로도 꾸준히 이런 청개구리 같은 불편한 책들을 펴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면 나도 그의 주머니에 책값 10%의(더 적을지도 모른다!) 보잘것없는 인세나마 보탤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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