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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링인북스 Jul 17. 2023

호흡과 리듬, 그리고 온전함

천천히 읽는 힘

 평소 한 권의 책을 천천히 읽는 것을 좋아한다. 처음부터 나의 독서 습관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2015년쯤 상상력과 창의력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예술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다.  아이디어를 많이 만드는 능력에 초점을 둔 프로그램보다는 상상력과 창의력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었다. 그때 문득 드로잉이 생각났다. 보통 미술에서 드로잉을 시작할 때 오랫동안 대상을 관찰하라고 한다.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그릴 대상을 관찰하다 보면 처음에 알았던 것과는 다른 느낌으로 대상이 다가오는 경험을 종종 할 수 있다. 이런 드로잉적 경험을 책에서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책 한 권을 면밀히 관찰해 보고 느껴보는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부터 천천히 읽어가는 책의 묘미를 알게 된 것이다.  또 창의력은 번뜩이는 아이디어로만 정의할 수 없다. 창의력과 상상력의 원천은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공감하고 찬찬히 함께 느낄 수 있는 마음의 힘에서 나오는데 그것을 도와줄 힘도 천천히 관찰하며 읽어내는 책에서 한번 찾아보고자 했다.

 

 그렇게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 권의 책을 곁에 두고 매일 읽어 보는 과정에서 천천히 읽는 기쁨과 즐거움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를 천천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느새 내 마음에는 다양한 텍스트들이 나의 내면의 색들과 어울려져 고유함을 지니게 된다. 한 때 경쟁적으로 이 책 저 책을 읽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었던 책이 주는 온전한 색을 찾을 수 있었다. 그날의 분위기와 나의 감정, 나의 경험치에 따라 책은 매번 다른 감상을 주었고, 어떤 날은 한 줄의 문장이 하루종일 맴돌아 그 문장과 어울리는 장소로 여행을 떠나 보기도 하였다.  책을 읽는 이런 태도들은 삶의 어떤 순간을 맞닥뜨리더라도 나만의 감각으로 세상을 느낄 수 있는 힘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장마가 시작되는 초 여름. 나는 중학교 3학년 송화와 여름방학 동안 함께 읽어 볼 책으로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를 택했다.

 책에서 묘사되는 한스가 사는 아름다운 자연의 시골마을은 우리를 데리고 그 마을로 가기에 충분했다. 주인공 한스는 감수성이 예민하고 똑똑한 소년이다. 몇 시간 동안의 사색도 즐길 줄 알았으며, 물레방아를 직접 만들고 자르면서 손끝의 감각을 얻게 되는 즐거움도 알았다. 따뜻한 시간 속에서 조용히 가라앉는 마음에 집중하며 낚시를 하는 것이 낙이였고, 공부를 대할 때도 진정한 학식은 어려워지더라도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다면 하루하루 더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고 확신할 줄 아는 소년이었다. 적어도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말이다.

 그런 한스가 송화는 부럽기도 했다고 한다.

 “한스가 부럽기는 하지만 너무 부럽지도 않아요. 내가 부럽다고 느끼는 건 해야 할걸 알고 해 나가는 모습이지 한스도 딱히 공부의 목적이 있는 것 같진 않아요.” 예리한 지적이다. 송화도 한스가 억눌리고 있는 자유와 주체성에 대해 갑갑한 감정을 느낀 것이다. 그리고 한스가 부럽다고 한 것은 무엇인가를 열심히 하는 태도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20세기 초 독일 사회를 비판한 소설에서나 21세기의 한국 사회나 청소년들의 삶은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어 보인다.

  인간은 누구나 고유한 주체성을 가진 한 사람의 소중한 존재이다. 하지만 그런 고유한 주체성을 존중받기보다는 오히려 지금의 사회는 세상의 속도에 맞춰 뒤처지지 않게 살아가길 강요받는다.

 여기서 또 다른 문제는 세상의 속도 또한 지나치게 빨라졌다는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의 보급으로 하루에도 다 소화해 내지 못할 만큼의 엄청난 양의 정보가 쏟아진다. 의도치 않게 접한 정보를 해석하느라 불필요한 에너지도 많이 쓰게 된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빠른 속도와 엄청나게 쏟아지는 정보에 떠밀려 내가 어디로 흘러가는 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지금 잠시 멈춰 서서 크게 숨을 고를 필요도 있다. 자신의 호흡과 자신의 리듬에 집중하여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이고 채워야 할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내는 힘이 필요하다.

 책 한 권을 깊이 천천히 읽고 때로는 밖으로 나가 산책을 하며, 자신의 호흡과 리듬에 귀를 기울여 본다. 느리게 때론 천천히 기다리고 또 기다려보며 자신의 존재의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시간을 가져 보는 것이다. 떨어질 학업 성적이 걱정되어 이럴 시간이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회는 인간존재에 대한 본질을 잃어버린 사회이다.

 자신의 경험과 행위를 자기 것으로 수용하고 자신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모르는 사람 위에, 아무리 많은 능력치가 올라간다 해도, 그 모습은 위태로울 것이다. 자신만의 속도와 호흡, 그리고 리듬을 잊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걷고 또 걸으며 그냥 거기에 존재함으로써 얻는 기쁨을 마음껏 누리는 삶을 생각해 본다.      

 <수레바퀴 아래서>를 천천히 읽었던 여름.  

 물이 주는 이미지, 감정과 행복에 대한 탐색, 자화상을 그리며 한 달간의 천천히 읽기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사진: UnsplashThought Catal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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