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는 이 소설에서 속도와 기억. 느림과 성찰을 대비시킨다. 느림은 기억과 깊이, 사유를 갖지만 속도는 망각, 피상성, 즉각적 쾌락을 동반한다. 즉 천천히 살수록 우리는 더 많이 기억하고 깊이 느끼는 반면 빠르게 살 때 우리는 더 쉽게 잊는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두 이야기가 겹쳐서 진행된다. 18세기와 현대.
18세기는 느림의 세계다. 이 때는 사랑과 유혹의 관계가 여유롭고 감정이 천천히 축적된다. 인간은 이때 순간순간을 음미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는 속도의 세계다. 사람들은 빨리 보여주려 하고 인정받으려 한다. 행동은 많지만 깊이가 없다. 결국 현대인은 보이기 위해 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자 이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나는 이 책을 크게 삼등분해서 읽어냈다.
1. 나(서술자)와 아내가 시골의 호텔(성)로 차를 타고 가는 길
-호텔(과거에는 성이었음)에서 하룻밤을 묵기 위해 나와 아내는 차를 타고 가는 중이다. 길에서 속도에만 급급하는 사람들에게 아내 베라가 말한다.
"50분마다 한 사람씩 프랑스의 도로 위에서 죽어요........ 어째서 운전석에 앉으면 두려움을 모르게 되는 걸까요?"
이때 나는 서술자로서 설명한다.
'오토바이 위에 몸을 구부리고 앉아 있는 사람은 오직 제 현재 순간에만 집중할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과거나 미래로부터 단절된 한 조각 시간에 매달린다....(중략)..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것도 겁날 게 없다. 속도는 기술 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형태다.. 어찌하여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이후 성(호텔)에 도착하기까지 2개의 이야기가 삽화처럼 끼어든다.
비방 드농의 단편 <내일은 없다>와 , 에피쿠로스의 <쾌락에 대하여>인데 이것들이 소설의 주제를 암시한다.
2. 성(호텔)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하룻밤 사건들과 이야기들. 여기서는 지식인들의 학회 세미나가 열리는 중이었는데 모두 서로를 의식하고 과장된 말과 행동으로 자신을 드러내려 한다.
-보여주기를 좋아하는 정치인들이 아프리카의 원조나 에이즈 환자들을 찾아가는 것은 카메라를 위해서이다.
- 퐁트벵(역사학자)과 벵상(곤충학자)의 대화에서 퐁트벵은 정치인들의 대부분이 춤꾼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권력보다는 명예를 갈구한다는 점에서 춤꾼이다.